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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박노자칼럼]]></title>
        <link><![CDATA[http://www.hongsehwa.pe.kr/zbxe/parknoja]]></link>
        <description><![CDATA[]]></description>
        <language>ko</language>
        <pubDate>Sun, 01 Aug 2010 02:34:31</pubDate>
        <totalCount>252</totalCount>
                <item>
            <title><![CDATA[비밀글입니다]]></title>
            <author><![CDATA[PHJ]]></author>
            <link><![CDATA[http://www.hongsehwa.pe.kr/zbxe/7703177]]></link>
                        <description><![CDATA[비밀글입니다]]></description>
                        <pubDate>Wed, 18 Nov 2009 11:07:49</pubDate>
        </item>
                <item>
            <title><![CDATA[선생님을 위하여 미국에서ㅕ]]></title>
            <author><![CDATA[chaewoon]]></author>
            <link><![CDATA[http://www.hongsehwa.pe.kr/zbxe/1063801]]></link>
                        <description><![CDATA[<P>미국 캘리포니아에서&nbsp; 홓선생남&nbsp;<BR>을 사모하는 50대 남자( ?)가 보넵니다.<BR><BR>홍선생의 진보신당행의 변을&nbsp;보고&nbsp;신중하개 &nbsp;진보신당에 가입했습니다.<BR><BR>저는 선생님이 말씀하신 80/20의 20에 차지하는줄 알았던 사람입니다.<BR><BR>저를 깨우처 주시고 <BR><BR>미국에서의 생활을 선생님의 눈으로 보고 싶스니다.<BR><BR>진보신강의 척후병도 좋고 창립위원(?) 도 좋은이까<BR><BR>제발 홍세화라는 이름을 걸어 주세요<BR><BR>큼 힘이되겁니;다.<BR><BR>멀리사 홍선생님과&nbsp;진보정당을 위하여 <BR><BR>힘찬 박수를 !<BR><BR>홍선생님 미국에서도,,,, <BR><BR>고맙습니다.<BR><BR></P>]]></description>
                        <pubDate>Tue, 25 Mar 2008 06:31:19</pubDate>
        </item>
                <item>
            <title><![CDATA[한국경제의 쟁점, 속 시원하게 뒤집어보기]]></title>
            <author><![CDATA[안감독]]></author>
            <link><![CDATA[http://www.hongsehwa.pe.kr/zbxe/189030]]></link>
                        <description><![CDATA[<P>한국경제 강좌 10월 30일까지 신청마감입니다. <BR>신청은 참여연대홈페이지에서 하실 수 있습니다.<BR>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MAP name=Map><BR><IMG height=1386 src="http://www.peoplepower21.org/newsletter/etc/images/etc-20071007-01.gif" width=510 border=0 editor_component="image_link"></MAP></P>]]></description>
                        <pubDate>Fri, 26 Oct 2007 06:28:57</pubDate>
        </item>
                <item>
            <title><![CDATA[한겨레에서]]></title>
            <author><![CDATA[gingery]]></author>
            <link><![CDATA[http://www.hongsehwa.pe.kr/zbxe/69067]]></link>
                        <description><![CDATA[‘반한 단체’? 출입국관리사무소!<br /><br /><br /><br /><br />&nbsp;&nbsp;<br /><br />몇 개월 전 ‘국제 테러리즘’과 연결됐다는 국내 외국인의 ‘반한 단체’에 대한 보도가 나왔다가 곧 오보로 밝혀졌다. 당국에 의해 외국인 노동자의 종교·인권 단체들까지 ‘테러적 반한 단체’로 규정되어 그 활동가들이 억울한 고충을 당하게 되는 셈인데, 무엇보다 그 ‘반한 단체’라는 말은 필자에게 인상적이었다. 그에 대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문득, ‘반한 테러 단체’라는 말과 겹쳐지는 이미지 하나가 나타나 필자의 머리를 스쳤다. 그러나 그 이미지의 주인공은 통상 서방 언론의 말에 따라 상상되는 가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이슬람 광신도’의 지하 서클이 아니었다. ‘출입국관리사무소’라는 엄중한 느낌의 현판이 걸려 있는 목동의 한 큰 건물에서 정장을 한 채 심사대에 조용하게 앉아 있는 중년 관료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br />한 국가기관이 반국가 테러단체라니 이건 말장난치고도 심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금 참고 생각해보자. ‘테러’란 원래 무슨 뜻인가? ‘공포’란 뜻이다. 미국의 세계적 공포정치에 맞선 이슬람 과격파의 행동들도 ‘테러’로 볼 수 있겠지만, 절대적 약자인 외국인 노동자들을 상대로 벌이는 출입국관리사무소의 횡포도 공포의 분위기를 의도적으로 만들어내는 국가적 폭력 즉 ‘테러’적인 행동으로 밖에는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수년 동안 피땀을 흘려 일해온 노동자들이 ‘불법 외국인’이라는 딱지가 붙여져 친구나 가족에게 마지막 인사말도 못한 채 길 가다가 잡혀가고, 합법 체류의 노동자들마저도 “불법 동료들의 주소를 대라”는 단속반들에게 난타를 당하고, 심지어 안산외국인노동자 센터의 목사인 일개 성직자마저 구타와 모욕을 당하는 광경을 보고 들은 외국인 노동자들은 상상하기 어려운 공포를 느끼며 살고있다. 이슬람 테러가 살인을 다반사로 하지만 외국인 노동자 단속반은 누굴 죽인 것도 아니지 않았느냐 생각할 수 있겠지만 한국에 오기 위해 사채로 천만원대의 빚을 지고 정당한 월급도 받지 못한 채 강제로 내보지는 것은 그들에게 사형선고에 가깝다는 사실을, 사채업자의 횡포가 극심한 한국에서라면 이해돼야할 만도 하다. 단속반의 ‘업무수행’에 대한 공포로 몇 개월 동안 안식처를 떠나지 못하고 끼니도 못 챙기는 국가적 테러리즘 피해자들의 사정을 생각보야야 한다. <br /><br />외국인 노동자 관련의 방침이 위에서 하달되는 것이고 단속반이 집행할 뿐이라는 변명의 소리가 들릴지 모른다. 그러면 ‘동북아 허브’를 꿈꾸는 국가에서 “유쾌한 체류 분위기를 조성하라”는 방침을 내렸을 법한 많은 합법 체류자를 대하는 태도를 보자. 이 국가를 손아귀에 넣어 보려는 구미인·일본인 투자자들이야 당연히 편의를 제공받아 목동에 가서 떨 일이 없지만 출입국관리사무소에서 한국인 남편을 둔 필리핀 부인이나 베트남 유학생, 중국인 강사들이 이구동성으로 “반말투와 고압적 태도로 누명이 짙은 그 곳으로 갈 때마다 무서운 공포를 느낀다”고 말한다. 차별과 멸시의 벽이 허물어져 ‘유쾌한 체류 분위기’가 조성됐다면 한국과 아시아·아프리카를 연결시켜주는 친한파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을 일상적 공포에 적대감만 느끼는 ‘영원한 이방인’으로 만드는 것이 ‘반한 활동’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br /><br />근엄한 정장 풍의 이 ‘반한 분자’들이 끼치는 해악을 어떻게 최소화할 수 있을까? 숙련·비숙련을 포함한 외국노동에 대한 근로허가제와 차후 영주권 부여의 가능성을 근간으로 하는 포괄적인 근로이민 수용의 제도가 근본대책이 되겠지만, 우선 빠른 시일 내에 인종차별을 방지하기 위한 법적·행정적 장치들이 마련돼야 한다. 미국 사업가에게 깎듯이 존댓말을 썼다가 옆에 있는 베트남 노동자에게는 갑자기 봉건시대 노예 대하듯 하는 관료가 자신의 행동에 무거운 법적 책임이 따를 줄을 알게 되어야 한다. <br /><br /><br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br /><br /><br /><br />]]></description>
                        <pubDate>Mon, 17 Jan 2005 16:57:21</pubDate>
        </item>
                <item>
            <title><![CDATA[제복을 강권하는 사회]]></title>
            <author><![CDATA[노네임]]></author>
            <link><![CDATA[http://www.hongsehwa.pe.kr/zbxe/69072]]></link>
                        <description><![CDATA[[제복을 강권하는 사회] - 한겨레신문 2005.02.14<br /><br />가끔 귀국하여 서울에서 지하철을 탈 때 필자는 적지 않은 이질감을 느낀다. 왜 그리도 양복 정장 입은 사람들이 많은지, 남성들은 하나같이 철저하게 면도하여 수염 키우는 사람이 드문 것에 대해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br /><br /><br />대부분의 회사원·관료들은 근무 시간에 양복 정장을 입는데 양복의 본고장인 구미에서는 본인의 의사에 따라 평상복을 입거나 넥타이는 안 매는 곳 등 복장 규칙이 훨씬 덜 엄격하다. 대학 교수들에게 강의할 때 상체와 목을 조이는 정장·넥타이를 강요하는 경우를 여태까지 외국의 어느 학교에서도 본 일이 없었다. 필자가 가본 대다수의 나라에서 수염을 기르는 일은 기업체든 누구든 무어라 할 수 없는 개개인의 자유이다. 하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양복 정장이 마치 샐러리맨의 제복처럼 되어 있고 수염 없는 ‘단정한’ 외모가 정상적인 남성의 필수조건인 양 인식되어 있어 개체의 겉모습은 전체의 눈치를 봐야 한다. 활동하기 편하게 얼마든지 현대적으로 개량될 수 있는 한복과 같은 훌륭한 복장이 있는 나라에서 하필이면 심신을 고문하는 듯한 뻑뻑한 양복 정장·넥타이를 입어야 한다는 것이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닌가. <br /><br /><br />그럼 양복 정장을 입고 ‘깨끗이’ 면도한다는 것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뭘 뜻해왔는가? <br /><br /><br />개화기에 양복 착용은 소수 관료나 민간 개화파, 외국인의 특권적 위치의 상징이었다. 문관들에게 의례복으로 일본식 양복을 입으라고 명한 고종의 1900년 4월17일자 칙령 제14호는 양복 정장 권력화의 시초였다. 일제시대에도 양복 정장을 입고 수염을 다 깎거나 유럽·일본의 유행대로 카이저 콧수염만 기르는 것은 일본인이나 소수 상류층의 표시였다. 그러다 남한에서는 양복 정장차림·면도가 시골사람에 비해 우월하다는 도시인을 상징하게 됐고, 작업복 차림의 노동자에 비해 우월한 화이트칼라라는 ‘중산층의 제복’이란 의미를 갖게 됐다. 이 제복은 학교와 군대라는 억압기제를 통해서 중산층들에게 얼마든지 강요할 수 있었다. 1987년의 시민혁명을 완료시키지 못하고 오늘에 와서야 천천히 문화혁명을 일으키기 시작한 이들은 국가·자본에 대한 예속성이 강하기 때문이다. 감수성이 예민한 학생 때 교문 앞 복장검사에서 ‘불량’으로 걸려 엎드려뻗쳐, 원산폭격, 교실까지 오리걸음 등 인격을 파괴하는 처벌을 받고 군에서도 면도를 당연히 해야 하는 걸로 습득하고 나면, 그후 공무원 조직·기업체에서 일률적인 복장 문화에 자연스럽게 복종하게 되는 것이다. 나아가 옷을 ‘제멋대로’ 입거나 외모가 ‘단정’하지 못한 사람을 자기도 모르게 ‘괴짜’ ‘튀는 놈’ ‘뭔가 못 믿을 자’ ‘군기 빠진 이’로 여기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복장과 외모의 규칙을 체화하게 되면 일상적인 권위주의의 또 다른 담론과 행동방식들을 더 쉽게 받아들이게끔 된다. 그것이야말로 양복 정장을 ‘주류’ 사회의 제복으로 만든 지배층이 원하는 바이다. <br /><br /><br />2003년 봄, 한 국회의원이 평상복 차림으로 등원하다 보수적인 동료들의 거센 저항에 부닥친 사건이 우연이었을까? 권력을 상징하는 국회에서 자연스런 평상복이 보이고 권위를 상징하는 교수들이 반바지를 입은 채 강의할 수 있다면 이는 병영사회 체제의 붕괴를 상징적으로 의미하는 일일 것이다. ‘복종 문화’를 성역으로 여기는 사회의 ‘상전’들은 결코 바라는 일이 아니겠지만 말이다. <br /><br /><br />의상이나 외모가 내면적인 ‘나’의 표현인 만큼 의상과 외모의 균일화는 집단에의 무조건 항복과 함몰을 가장 강력하게 상징한다. 사회 전체의 목을 죄는 보이지 않는 선도부의 손, 내면화된 ‘용의검사’의 정신을 우리는 언제쯤 벗어날 수 있을까? 우리 사회의 민주화가 미시적, 일상적 차원까지 미치기 위해서 무엇보다 병영사회의 망령을 벗어나는 일이 열쇠가 될 수 있다. <br /><br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br />]]></description>
                        <pubDate>Mon, 14 Feb 2005 06:22:58</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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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직장선배가 파리에 갑니다.]]></title>
            <author><![CDATA[강동주]]></author>
            <link><![CDATA[http://www.hongsehwa.pe.kr/zbxe/69075]]></link>
                        <description><![CDATA[&nbsp;&nbsp;홍세화 선생님 안녕하세요<br />저는 한국서울에서 경찰공무원으로 근무하는 강동주입니다.<br />다름이 아니오라 5월4일에서 9일 사이에 선배님이 파리를 방문합니다.<br />주간에는 단체로 관람을 하고 야간에 개인적으로 시간을 갖는답니다.<br />&nbsp;&nbsp;제가 유치장에 있을때 빠리의 택시기사를 만났습니다. 제가 파리에 가면&nbsp;&nbsp;뵐려고 했는데<br />선배가 먼저 가니 귀한 시간좀 내주길 바라며 연락처라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br />그럼 건강하십시오]]></description>
                        <pubDate>Mon, 02 May 2005 13:50:01</pubDate>
        </item>
                <item>
            <title><![CDATA[&amp;lt;강연&amp;gt; 6/28 박노자, '대추대첩의 본질'을 말한다]]></title>
            <author><![CDATA[강형규]]></author>
            <link><![CDATA[http://www.hongsehwa.pe.kr/zbxe/69077]]></link>
                        <description><![CDATA["푸른 눈의 러시아 출신 한국인, 한미 동맹의 역사와 본질을 말한다"<br /><p align=center><img src="http://www.seoul-e.net/zb41/bbs/data/18th_image/111.jpg" width=600></p><br />1. 강연자 소개 : 박노자 <br />1973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생<br />1993년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교 동방학부 한국사학과 졸업<br />1996년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러시아 국립 인문대학교 강사 역임<br />현재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 한국학 교수, <아웃사이더> 편집위원 <br />저작 :&nbsp;&nbsp;하얀 가면의 제국, 우리 역사 최전선, 나를 배반한 역사, 당신들의 대한민국 등 <br /><br />2. 강연장소 : 서울교육대학교 사향문화관 <br />- 교대역 13번 출구에서 200m 가량 직진 후 서울교대 ^청람문^으로 들어오시면 강연장소까지 안내표지를 달겠습니다.<br /><br />3. 강연일시 : 6월 28일(수) 18시-20시 <br /><br />4. 강연계획 :<br /> 18시-19시 30분 강연<br /> 19시 30분-20시 질의응답<br /><br />5. 강연참가비 : 2000원 (김밥 / 강연 자료 제공)<br /><br />6. 주최 : 서울교대 총학생회 & 전국학생행진<br /><br />7. 강연문의 :&nbsp;&nbsp;snue20@hanmail.net / 011-9182-5504&nbsp;&nbsp;<br />]]></description>
                        <pubDate>Wed, 14 Jun 2006 09:50:09</pubDate>
        </item>
                <item>
            <title><![CDATA[박물관에 가기 싫어진 까닭 / 박노자]]></title>
            <author><![CDATA[한겨레펌]]></author>
            <link><![CDATA[http://www.hongsehwa.pe.kr/zbxe/69060]]></link>
                        <description><![CDATA[<br />어린 시절부터 역사를 좋아했던 내가 가장 자주 갔던 곳은 바로 박물관이었다. <br />처음 한국에 왔을 때도 도착한 다음 날 국립중앙박물관을 마치 순례자가 된 듯한 기분으로 견학했던 기억이 난다. 많은 어린 학생들이 견학을 와서 구경하는 광경은 나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아, 오랜 역사를 가진 나라인 만큼 어릴 때부터 과거를 존중하도록 아이들을 잘 키우는구나’하고 생각되었다. 그 생각이 순진했다는 걸 언제 깨닫게 되었던가? 국가 제도사와 군사적인 이야기가 골격을 이루는 국정 국사교과서를 처음 읽었을 때였던가? 아니면 왕족·장군들이 역할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사극을 처음 시청했을 때였던가? 어쨌든 나는 오래지 않아 한 가지 근본적 사실을 이해하게 됐다. 각종 박물관의 주된 고객인 견학 학생들은 단순히 ‘과거’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지배층의 뜻에 맞춘 국가주의적 방향으로 박제된 과거의 이미지를 시키는 대로 학습한다는 사실이다. <br /><br />그럼 학생들이 보고 외워야 할 과거의 모습이란 어떤 것인가? <br /><br />첫째, 견학생들에게 국가적 소속감을 주입해야 하므로 박물관 전시에서는 ‘우리’와 ‘남’을 철저하게 구분한다. 전시용 유물들은 ‘우리 것’ 위주로 골라지고 ‘남의 것’들은 비록 ‘우리’와 연관돼 있다 하더라도 홀대를 받는다. 예컨대 고대·중세의 불탑·사찰이나 불상·사리함과 같은 불구(佛具)를 잘 이해하려면 멀리는 인도·서역, 가까이는 중국·일본의 유물과의 구체적인 비교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우리의’ 박물관은 ‘우리 것’만을 내세운다. ‘우리 전통의 우수성’이 강조돼야 된다는 것이 명분인데 우수성이 잘 보이게 하기 위해 보편적 맥락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다는 사실이 망각되는 것이다. 문화 교류 역사에서 한발짝 앞으로 나아가면 고구려의 낙랑 계통 주민과 백제의 일본계 관료부터 일제시대의 화교까지, 이 땅에서 함께 동고동락해온 수많은 혈통적인 ‘남’들의 이야기도 들려줘야 하는데, ‘동북아의 허브’가 되려는 나라답지 않게 박물관들은 이 점에 대해 너무 인색하다. 그러한 박물관을 견학하던 학생들이 나중에 이주노동자들을 도외시·이질시하게 되는 것이 놀라운 일인가? <br /><br />둘째, ‘우리’ 국가가 진·선·미의 화신으로 인식돼야 하는 만큼 박물관이 만들어서 보여주는 ‘우리’의 과거는 마냥 아름답기만 하다. 보기 좋은 청자·백자·산수화·예복 등은 박물관의 제한된 공간에서 하나로 어우러져 보는 이의 미의식을 자극해 ‘우리’의 역사를 허물없이 예쁘게만 보이게 한다. 그러나, 그 어느 계급사회도 아름답고 자랑스러운 과거만을 가질 수는 없으며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지폐에서까지 모습을 보이는 율곡·퇴계가 실은 수많은 노비를 부리면서 살았던 귀족이고, 그들이 살았던 시대에는 사대부가 노비를 때려죽이더라도 형벌 받는 일이 거의 없었다는 것도 가르치고 함께 토론해보는 교육을 한다면 군대·학교·가정을 비롯한 사회의 여러 부문에 아직 만연하고 있는 폭력이 줄어들 수 있지 않을까? <br /><br />셋째, 외세 침략과 같은 외부적 모순들이 박물관의 전시에 반영돼도 ‘우리’ 역사의 내부적 모순들은 주로 은폐된다. 예컨대 ‘민족의 우수성’을 만방에 알리는 불상의 조성이 사찰노비의 강제된 노동과 국가라는 폭력조직의 보시로 이루어졌다면 그건 부처의 가르침으로 보아 심각한 모순이다. 그러나 박물관은 비판의식을 가르치지 않는다. ‘아름다운 우리 역사’는 감상용이지 반성용이 될 수 없다.<br /><br />언젠가 민중의 웃음과 울음소리가 동시에 들리고 과거의 명암으로 현재를 다시 생각해 보게 해주는 박물관이 생길 수 있을까? 사학계가 ‘국가관’이나 ‘단일민족론’이라는 강박관념을 벗어버리고 민중이 과거에 대한 집단 기억을 규정하는 주체로 나설 수 있다면 불가능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br /><br />박노자/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br /><br />]]></description>
                        <pubDate>Mon, 20 Dec 2004 12:31:35</pubDate>
        </item>
                <item>
            <title><![CDATA[오태양님에게 / 박노자]]></title>
            <author><![CDATA[한겨레펌]]></author>
            <link><![CDATA[http://www.hongsehwa.pe.kr/zbxe/69050]]></link>
                        <description><![CDATA[안녕하십니까? <br />님이 구속됐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과거 청산의 목소리도 높은데,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자는 이들은 제국주의가 남긴 가장 흉악한 유산이 일체 남성은 병사가, 일체 여성은 현모양처가 돼야 된다는 강제적 성별 정체성이라는 사실을 어찌 깨닫지 못하겠습니까? 여러 사람들의 노력으로 “현모양처가 되어 나라를 위해서 아이를 낳아 훌륭하게 키워라” 같은 소리들은 이제 지상명령으로 들리지는 않는 듯합니다. 그럼에도 일부 남성들에게는 일제말기 조선의 ‘황민화’를 주도했던 ‘반도의 히틀러’ 시오바라 토키자부로(총독부의 학무국장)의 “가장 빛나는 국민의 영예는 바로 국가의 위대성으로 살며 국운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치는 신성한 병역”이란 말이 진리로 들릴지도 모릅니다. 일제의 ‘전통’을 이은 세뇌 체제의 탓도 있지만, ‘신성한’ 의무를 다했기에 여성·장애인 등 ‘나라에 충성할’ 기회가 없는 사람들을 만만한 존재로 대해도 된다는 왜곡된 특권 의식도 문제일 것입니다. 한국적 파시즘의 기본 구조가 유교적 가부장주의와 일제의 남성 우월주의적 국가주의의 결합인 만큼, 파시즘의 해체 작업에 있어서 우리 남성들의 집단의식이야말로 큰 문제로 부상되는 것입니다. <br /><br />제가 병역거부를 논할 때마다 듣는 질문은 “아무나 다 거부할 수 있으면 나라를 누가 지키겠는가?”라는 말입니다. 그러한 질문을 하시는 분들께 저는, 평화주의의 전통이 깊고 대체복무 경력자에 대한 차별이 없는 북유럽에서조차 대체 복무 신청자의 수가 전체 징집대상자의 10~15% 정도밖에 안된다, 한국과 전통이 가까운 대만에서는 대체복무를 선택하는 사람의 수가 수천 명을 넘지 않는다, 한국처럼 군사주의가 강하고 예비역들을 선호하는 사회분위기에서라면 개인적 신념이 강한 극소수만이 ‘평화주의자’의 낙인을 감수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합니다만 제 말이 받아들여지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사실, 그들의 질문 속에는 “한 사람이라도 병역을 합법적으로 거부하면 징병제의 신성함이 없어져 나라를 보전할 수 없다”, 즉 “모두들 몸과 마음을 국가에 바치는” 국가가 아니면 결코 그 국가가 지켜질 수 없으리라는 두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예외를 모르는 국가적 전체성은, 그들에게는 국가의 ‘신성성’의 전제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가시적인 ‘다름’을 ‘망국병’으로 생각하고 인권이 아닌 국가와 무력을 신성 불가침한 존재로 여기는 황국신민 수준의 사고야말로 청산해야 할 과거 유산이 아니겠습니까? <br /><br />이 왜곡된 ‘상식’에 앞장서서 반기를 들어야 할 집단은 다름 아닌 종교계입니다. 특히 일제 말기에 군국주의적 굴절이 태심했던 한국 종교계의 경우에는 자기 반성의 의미로라도 군사주의 근절에 적극적으로 나설 의무가 있습니다. 예컨대 불교계의 경우 “미·영 귀신들을 죽이면 죄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보살도를 실천하게 된다”고 시국 강연하는 등 일제 말기의 전쟁 협력이나 베트남 파병 때의 박 정권에의 협력도 커다란 오점으로 남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요 종교 단체들은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에 있어서 일제시절을 방불케 하는 논리로 반대하거나 아예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현재 속에서 살면서도 미래를 대표해야 할 종교계마저 과거의 망상에 사로잡혀 있다고 한다면 과거 청산이 쉽겠습니까? <br /><br />지금 수감 중인 병역거부자들은 인간이 국가·자본의 부품이 돼버린 사회에서 인간을 결코 부속품으로 만들 수 없다는 진리를 온몸으로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초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시겠지만 용기를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해방이 오고 나서 ‘불령선인’들이 독립운동가인 줄 밝혀졌듯이, 파시즘의 주술이 풀린 뒤에는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역사의 평가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br /><br />구름 낀 하늘을 바라보며 박노자 드림 <br /><br /><br />]]></description>
                        <pubDate>Mon, 20 Sep 2004 11:53:16</pubDate>
        </item>
                <item>
            <title><![CDATA[우리도 한번 미국인처럼? / 박노자]]></title>
            <author><![CDATA[한겨레펌]]></author>
            <link><![CDATA[http://www.hongsehwa.pe.kr/zbxe/69054]]></link>
                        <description><![CDATA[<br />최근에 “사랑해요, 아메리카”를 부르며 국가보안법의 철폐를 결사반대하고 종교계의 부패에 대한 어떤 비판이라도 “마귀의 행각”으로 보는 일부 극우 기독교인들의 추태를 지켜보다가 문득 이를 어디에선가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10여년 전 러시아에서 만나본 한국 선교사들에게 그 같은 극단적 독선과 냉전 논리 신앙화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필자가 내심 걱정한 것은 한국의 국외 이미지 개선을 하나의 목적으로 하는 선교가 이렇게 하다 자칫 정반대의 결과를 낳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br />자신의 신앙을 타자와 함께 나눔으로써 타자를 이롭게 한다는 의미의 선교는 모든 종교인들의 생리일 것이다. 문제는, 국가와 유착하여 그 논리를 체화한 제도권 종교의 선교 행위도 지배자들의 사유·이해관계를 반영한다는 것에 있다. 한말부터 한국에 들어온 미국계의 개신교 선교사들은 교육·의료에서 기여도 해 왔지만 무속·불교 등을 ‘우상숭배’로 낙인찍어 배척하는 등 전통과의 단절을 심화시키기도 하고 광적인 숭미주의에 젖은 매판 엘리트를 키워내어 한국의 내면적 식민화를 촉진시키기도 했다. 1960~70년대에 접어들어서야 함석헌 선생 등의 선각자들은 미국 선교사들이 끼친 해악을 내부로부터 극복하기에 이르렀는데, 전통·제3세계와의 교감·연대에 대한 그들의 깨달음은 ‘비주류’의 몫으로 남아있다. 특히 세계 주변부 지역을 선교지로 택하는 많은 한국 선교사들은 과거에 한국 땅에서 중심부 세력들의 종교적 대리인들이 저질러온 일들을 이제 밖에서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br /><br />러시아에서 만난 한국 보수적 교회들의 선교사들이 가장 자랑했던 것은 “어려운 고려인을 키워주고 도와준다”는 것이었다. 물론 어렵게 사는 동포들에게의 지원은 고맙지만 실제로 교회들이 집중적으로 ‘키워주는’ 것은 소수의 고학력 개종자들이었다. 미국을 절대시했던 한국의 친미 개신교 엘리트만큼이나 한국 교회에서의 선택을 자랑하는 그들의 인생이 탄탄대로에 오른 것이야 좋지만 이들 수혜자 집단을 보는 다수 동포나 현지 주민들의 시선은 어떠할까? 결국 매판적 소수에 집중되는 시혜는 궁극적으로 분열과 갈등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갈등을 더욱 악화시키는 것은 현지를 보는 선교사들의 “미국적인, 너무나 미국적인” 시각이다. “지금 구 공산권이 겪는 모든 어려움이 공산주의라는 죄악을 저지른 데에 대한 하나님의 응징”과 같은 발언을 하나님을 펜타곤과 월가의 편에 서는 존재로 보지 않는 현지인이 들으면 과연 어떻게 반응할까? 국민의 25%가 미국을 잠재적 침략자로 보는 옛소련에서도 환영 못 받을 사유방식이지만 미국 침략을 이미 당하고 있는 중동에서는 한국 교회들의 고질적인 숭미주의가 생명의 위협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br /><br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는 것은 재한 미국 선교사들의 무속·불교 멸시 못지 않은 한국 선교사들의 현지 문화·종교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이다. 같은 기독교 종파인 러시아 정교회마저 ‘진정한 기독교’로 보지 않는 그들은 이슬람에 대해서는 미국의 기독교 근본주의자 이상의 배타심을 내보이는데, 종교와 정치가 잘 분리돼 있지 않은 중동·중앙아시아에서 이는 “한국이 침략자의 편에 선다”는 메시지로 해석될 뿐이다. 그러한 메시지에 대해서 우리 모두 앞으로 과연 어떤 형태의 ‘답신’이 올지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알만 한 일이 아닌가? <br /><br />국내에서 수구 결사대로 활동하는 보수적 교회들은, 국외에서 물질적 시혜주의와 교세확대 제일주의, 현지의 전통에 대한 경멸, 그리고 일그러진 세계관으로 ‘제국의 시녀’라는 한국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강화시킨다. 빈민의 하나님, 신음하는 자의 하나님, 칼과 재판관의 법복을 부정한 하나님을 망각해버린 그들의 신앙 아닌 신앙의 안타까운 결과인 것이다. <br /><br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br /><br /><br /><br /><br />]]></description>
                        <pubDate>Fri, 29 Oct 2004 03:34:36</pubDate>
        </item>
                <item>
            <title><![CDATA[‘유일 사상 체제’의 그늘 / 박노자]]></title>
            <author><![CDATA[한겨레펌]]></author>
            <link><![CDATA[http://www.hongsehwa.pe.kr/zbxe/69055]]></link>
                        <description><![CDATA[<br />이번 강의석 군의 고투로 해당 고교에서 예배필수가 아닌 예배선택권이 어렵게 얻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특정 종교를 강요하는 나머지 대다수 종교계통 학교의 행태를 보노라면 서글픈 역사 법칙이 생각난다. 어떤 담론이 초기에 아무리 진보성을 가졌다 해도 점차 세력을 이루어 체제에 순응되기만 하면 오히려 극단적 반동의 모습으로 돌아설 수 있다는 법칙이다. <br />두 세기 전 조선의 성리학적 ‘유일 사상 체제’에 맞섰던 또 하나의 ‘강의석’, 초기 가톨릭 신도 바오로 윤지충(1759-1791). <br /><br />사대부들에게 절대 필수였던 제사를 폐하고 신주를 불태운 윤지충은 “국시 사범” “불효 막심한 사학(邪學)쟁이”로 지목돼 처형됨으로써 조선 최초의 순교자가 됐다. 동아시아 가톨릭들에게 제사를 금지시켰던 당시 교황청의 처사를 우리는 획일주의적 서구중심주의라고 비판할 수 있겠지만, 억압적인 성리학 체제에 대한 가톨릭들의 종교적 반란은 체제 밑에 깔려 있던 당대의 여성·하층민들에게 통쾌한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강의석’들이 목숨을 놓고 신념을 지켰기에 성리학적 절대주의 체제는 결국 여러 종교·이념들이 공존하는 상대주의 체제로 진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br /><br />그러면 조선 기독교의 이와 같은 진보적인 성격이 반대로 돌아서게 된 전환점이 언제일까? 주요 선교 단체들이 ‘정치적 중립’을 선언하고 독립투쟁을 지원해 달라는 애국자들의 요청을 매정하게 외면한 1900년대부터일까? 학교 부실 운영과 조선 풍습에 대한 모독, 학생 생활에 대한 지나친 통제·감시로 학생들이 동맹휴학을 해도 끝까지 ‘원칙’(?)을 고수하고 고집을 부렸던 1920년대부터일까? 사실 1920년대 초 배재·호수돈·정신 등 명문 개신교 계통 학교에서 학생 동맹휴학을 취재한 신문 기사들을 보면 이미 학교는 ‘전제적 왕국’을 방불케 했다. ‘기독교는 선진 문명’이라는 공식은 이미 1920년대에 무너졌지만, 교단의 보수화·반(反)민중화는 1930년대 후반 일제 전쟁에의 부역과 1945년 이후 미군정·이승만 체제 하에서 ‘준국교화’로 완결 지어졌다고 봐야 할 것이다. 성리학으로 탄압 받았던 종교가 이제는 반도의 한 쪽에서 성리학이 비워 준 자리를 그대로 차지해 그 폐단을 일체 답습하여 확대 재생산하게 된 것이다. <br /><br />자파만이 구원받을 사람이고 일체 타자들을 ‘이단’으로 몰아 “지옥 간다!”고 저주하는 일부 개신교도의 배타성은 이북에서 성리학이 비운 자리를 차지한 ‘유일 주체사상’과 과연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그들과 북한 지배 이데올로기가 다같이 자기 중심주의, 자만적 과대망상증, 절대성의 논리와 타자에 대한 배제를 특징으로 하는 세계관을 공유하는 것은 그들의 놀랄 만치 광적인 ‘반북 정서’를 설명해주는 단서가 된다. <br /><br />전교 학생들에게 예배를 억지로 강요하면서 신을 숭배하는 것은 과연 사랑과 용서의 하나님인가? 무섭게도 그들이 실제로 믿는 것은, 그렇게 인권을 유린해도 ‘주류’ 사회의 견제를 받지 않을 만큼 강하고 든든한 그들의 조직과 영향력이다. 약육강식의 논리를 받아들인 그들에게는 힘센 자와 가진 자야말로 복 받은 자이며 영웅이다. 힘의 논리를 부정함으로써 2000년 전에 출발한 기독교는 이제 이 땅에서 그 정반대로 둔갑되고 만 것이다. <br /><br />한국 교회가 초발심으로 돌아갈 길은 이번 강의석 군의 외로운 저항에서 정의를 갈구하는 마음, 신념을 지키는 의지, 남에 대한 존중을 부끄러운 마음으로 겸허하게 배우는 길이다. 그러나 2000년전 유대인 성직자들이 목수 아들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독자를 알아보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로, 한국 교회의 ‘높으신 분’들은 단식으로 쓰러진 학생의 야윈 얼굴에서 윤지충의 모습을 볼 줄 모르고 있는 것이다. <br /><br />박노자/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br /><br /><br />]]></description>
                        <pubDate>Mon, 22 Nov 2004 09:47:27</pubDate>
        </item>
                <item>
            <title><![CDATA[사회의 첫 경험 ‘알바’ / 박노자]]></title>
            <author><![CDATA[martina]]></author>
            <link><![CDATA[http://www.hongsehwa.pe.kr/zbxe/69041]]></link>
                        <description><![CDATA[<br />몇년 전 한국에서 학생들과 러시아어 수업을 한 적이 있다. 가끔씩 나는 효율적인 학습을 위해 학생들의 일상 생활에 관한 주제를 가지고 수업을 했다. 환란 위기가 한창이라 주머니 사정이 어려워진 많은 학생들이 학비와 용돈을 벌기 위해서 비정규 노동의 ‘전선’에 뛰어들었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아르바이트’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자고 하자, 학생들의 얼굴 표정이 금세 달라졌다. 피부에 와닿아 재미있겠다는 눈빛의 학생들도 있었고 순간 어두운 그림자가 스쳐 지나가는 듯한 표정들도 있었다.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그들에게 노동의 경험이 가슴앓이기도 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한국에서 아르바이트를 해본 외국인 학생들에게서 급여 체불이나 불의의 감봉 등의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었던 나는 그 문제가 학생들을 어둡게 만든다고 짐작했는데, 알고 보니 그것만은 아니었다. <br />대화를 시작한 학생은 나에게 먼저 “러시아어로 ‘동네북’이란 말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내가 의아해서 “노동 경험을 이야기하는데 왜 그런 단어가 나오느냐”고 되묻자 주유소에서 기름 넣는 일을 한다는 그 학생이 토해내듯이 말했다. “우리 처지를 다른 말로 표현할 수 없어요. 한쪽에서는 피곤한 직장인 손님들이 스트레스를 저한테 풀려고 고함지르거나 막말을 하고, 다른 쪽에선 지배인 아저씨가 심심할 때마다 기분 나쁜 농담을 하고요.… 선후배들 중에서 초과 근무를 하게 되거나 돈을 제때에 못 받거나 아예 못 받는 사람들도 있지만 전 그래도 그렇게까지 당한 적은 없어요. 하지만 발 닦는 걸레가 된 듯한 기분은 일을 그만두고도 오래 잊지 못할 것 같아요.” <br /><br />이 말이 끝나자마자 갑자기 각종 아르바이트 경험담이 봇물 터지듯이 쏟아져 나왔다. 3분의 1 가까이가 성추행에 시달린다는 중·고생 ‘알바’보다 대학생들은 적어도 그 부분에서 고생이 덜하다는 웃지 못할 ‘비교 우위론’도 들렸는데, 대다수는 사장들의 근로계약 작성 회피나 막말, 외모에 대한 모욕적 발언, ‘엿장수 마음대로’의 월급 지급 등을 흥분된 목소리로 고발했다. 편의점 같은 곳에서 일하는 아르바이트생들이 시간당 2000~2500원만 받는다는 걸 그때 처음 알게 된 나는 그후 편의점 갈 때마다 아르바이트생처럼 보이는 직원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기가 부끄러웠다. 상품을 언제든 편의점에서 편하게 살 수 있는 혜택을 누리는 고객인 나도 이 젊은이의 고혈을 짜고 있는 보이지 않는 착취의 공범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br /><br />결국 아르바이트라는, 절반 정도의 대학생들이 겪어보는 사회화의 과정에서 배우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 힘 있는 자(사용자)가 힘이 약한 자(아르바이트생)에 대해서 기본적인 법적 절차(계약 작성, 정확한 사례 지급)를 무시해도 된다는 무법 사회의 ‘역학 관계의 법칙’, 상위자이니 하위자의 인격을 존중할 필요가 없다는 수직관계 위주 사회의 인간적 존엄성 무시의 관행, 최저 임금 이하의 월급으로 무력한 ‘알바’들을 등쳐먹는 업체가 흑자만 내면 ‘효율적 경영’이라는 신자유주의의 일그러진 ‘경제 상식’. <br /><br />인권의 ‘인’자도 보여주지 않는 정글 자본주의의 연습이 차세대가 노동현장으로 진출하는 통과의례가 된다면 차후 우리 사회가 복지·안정 위주의 사민주의 체제로 재편되기가 쉽겠는가 지금도 ‘알바’ 인권을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 단체들이 적지 않겠지만, ‘알바’에 대한 부당 행위의 근절, 청년에 대한 사회적 대접의 개선은 진보정당도 학생운동 단체들도 더욱 많은 관심을 가지는 분야가 되어야 한다. 우리 학생들이 사회를 배우는 ‘청년 시절의 노동’ 아르바이트가, ‘동네북’ 신세가 아닌 보람과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경험이 돼야 할 것이다. 나아가서는 아르바이트생 인권 보호에 진척이 있어야 한국 사회의 고질병이라 할 수 있는 나이 차별과 비정규직 노동자 차별 문제에도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을까 싶다. <br /><br />박노자/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br /><br />]]></description>
                        <pubDate>Mon, 31 May 2004 01:22:40</pubDate>
        </item>
                <item>
            <title><![CDATA[[한겨레] 유일 초강대국 영원할까 / 박노자]]></title>
            <author><![CDATA[martina]]></author>
            <link><![CDATA[http://www.hongsehwa.pe.kr/zbxe/69042]]></link>
                        <description><![CDATA[<br /><br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은 “미국의 헤게모니라는 현실에 순응해야 한다”는 논리로 ‘미국 이후’를 대비하는 정책의 결여를 합리화한다. 그래서인지 이들은 “유일한 초강대국으로서 미국의 위치가 가까운 미래에도 변화가 없을 것”이란 이야기를 자주 들먹인다. 미국이 국제법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이 초대형 불량 국가의 횡포에 대한 혐오증이 세계인들이 공감하는 가장 보편적인 정서가 되더라도, 힘이 힘인 만큼 굴종하라는 이야기인가. 물론 어떤 시장도 흔들어 버릴 수 있는 자본력에다 왜곡·거짓을 ‘정보’란 이름으로 각처에 날릴 수 있는 매체력, 그리고 폭격·미사일로 ‘원주민’들을 쉽게 멸종시켜버릴 수 있는 군사력이라는 ‘삼위일체’의 위력을 과소평가할 것은 아니다. <br />그런데, 강대국들의 흥망성쇠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한 가지 법칙을 발견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강국이 ‘최강’의 위치에 올랐을 때마다 지속적인 과도 팽창의 유혹에 빠져 결국 정복·지배 비용을 감당할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또, 국고 탕진은 민생 도탄과 안팎의 피지배민의 저항으로 이어져 결국 ‘융성의 절정’은 쇠락으로 계승되었다. <br /><br />예를 들어 요즘 중국 민족주의자들이 무척 자랑스러워하는 청나라 건륭 황제의 시대(1735~1795)를 보자. 언뜻 보면 자랑스러워할 만한 측면들은 많았다. 차, 비단, 자기와 같은 중국 상품들이 유럽 시장을 장악하여 당시 중국인의 평균 소득이 유럽인 이상으로 높았다. 뿐만 아니라 ‘이성적인 유교, 합리적인 과거 시험’의 체제는 볼테르(1694~1778)를 비롯한 유럽 계몽주의자들에게 흠모의 대상이 되었다. 담론적 헤게모니의 차원에서도 중국은 그야말로 천하무적이었던 것이다. 이는 좌파 등 이단에 대한 미국 학계·언론계·정계의 타자화, 배척의 정도를 외국에서 잘 파악 못하듯이 수천권의 금서를 불살랐던 당시의 ‘문자옥’(文字獄)의 실체를 밖에서 잘 몰랐던 덕분이기도 했다. <br /><br />그러나 그 문물로 세계 최정상에 섰던 청나라의 건륭 황제가 최고의 업적으로 여겼던 것은 2300만량이라는 천문학적 금액을 들여 이루어진 1755~1758년 간의 준가르 한국(汗國)의 멸국과 신강(新疆) 영토의 정복이었다. 국고의 2년간 세수입에 해당하는 돈을 들여 60만명의 준가르 인들을 몰살시키는 지노사이드를 벌였는데, 그 결과로 새로 정복한 지역의 국경 수비와 주민의 ‘반란’, 곧 독립운동 진압 비용으로 해마다 막대한 비용을 지불해야 했다. 오늘날 미국의 국가예산을 적자투성이로 만드는 이라크 식민화를 방불케 한다. <br /><br />황무지 개간이 가능하여 중원의 잉여인구 일부를 흡수할 수 있는 신강의 정복은 그렇다 해도 이어 별 성과 없이 끝난 1768~1769년의 버마 침략, 1788~1789년의 베트남 침략, 1790~1792년의 네팔 전쟁 등의 의미는 살육과 낭비뿐이었다 할 것이다. 건륭 황제 자신이야 ‘탐학을 일삼는 변방 군주들의 제거’(후세인 제거)와 ‘불쌍한 변방 백성의 보호’(이라크인 인권 보호), ‘자비스러운 덕화(德化) 보급’(중동 민주화) 등의 명분을 내걸었다. 그렇지만 전쟁 비용으로 인한 각종 잡세의 난립과 구휼제도(복지제도)의 부실화, 그리고 탐관들과 연계된 정상배들의 전횡(핼리버튼사와 체이니 부통령의 추태)은 사회적 갈등을 심화시켜 제국을 쇠퇴일로로 가고 말았다. <br /><br />1796년에서 1805년에 걸친 백련교의 저항운동 이후에 민중들의 투쟁이 끊이지 않아 결국은 태평천국(1850~1864)이라는 ‘경쟁적 왕조’ 창립의 시도로 이어졌다. 18세기의 세계 최강 제국이 19세기의 침략의 대상물로 몰락하고 만 것이다. <br /><br />“달이 차면 이지러진다(月滿則虧).” <br /><br />가장 탐욕스러운 자본, 가장 교묘한 정보 가공, 가장 잔혹한 살육으로도 ‘돈 먹는 하마’인 군국주의적 제국을 영원한 제국으로 만들 수는 없을 것이다. <br /><br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br /><br /><br />]]></description>
                        <pubDate>Mon, 28 Jun 2004 03:50:50</pubDate>
        </item>
                <item>
            <title><![CDATA[티베트, 악마에서 천사로 / 박노자]]></title>
            <author><![CDATA[한겨레21]]></author>
            <link><![CDATA[http://www.hongsehwa.pe.kr/zbxe/69044]]></link>
                        <description><![CDATA[<br />[박노자의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br /><br />서구인들이 ‘진리의 낙토’로 찬양하는 땅… 왜 그들의 감화를 마냥 기뻐할 수 없는가 <br /><br /><br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 · 한국학 <br /><br /><br />몇년 전 필자는 한 미국인 학자와 함께 한국 사찰들을 순례한 적이 있었다. 한국이든 중국·일본·베트남이든 후한 점수를 주려 하지 않았던 그 학자의 비판적인 동아시아관에 예외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티베트였다. 한국 불교 지도층의 문제점을 예리하게 분석했던 그 학자에게 티베트 불교의 지도부는 ‘성인’(聖人)으로 보이고, 한국 선맥(禪脈)에서의 사자전승(師子傳承·사찰에서 스승과 제자 스님으로 이어지는 법) 계보들에 대해 의심함에도, 달라이 라마가 관음보살의 화신이라는 티베트 불교의 주류 세력인 겔룩파(Gelukpa·格魯派)의 주장은 그대로 긍정했다. <br /><br /><br /><br />△ 비하 위주의 ‘부정적인 오리엔탈리즘’ 대신 낭만적 소비로서 ‘긍정적 오리엔탈리즘’이 서구가 티베트를 보는 프리즘이 된 듯하다. 티벳의 수도 라사의 풍경.<br />(사진/ GAMMA)<br /><br /><br /><br /><br /><br />유럽에게 티베트는 왜 예외인가 <br /><br /><br />그 학자의 티베트관을 접했을 때 처음에는 티베트의 종교·독립 운동에 대한 개인적인 호감으로 생각했지만, 유럽에서 살게 된 뒤 학술적 차원이든 대중문화의 차원이든 ‘티베트’라는 존재가 많은 유럽인들에게 기타 비서구 지역들과 정반대로 의식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학술적인 차원에서 서방에서의 이슬람 문화권 연구의 묵시적인 전제는 “우리와 달리 근대화에 실패했다”는 테제이고, 한국학 연구에서는 성리학적 보수성, 공(公)적 공간의 불충분함, 노비제 등이 조명되는 등 비서구에 대한 비하론적 서술의 전통은 그대로 계승된다. <br /><br />그런데 티베트에 대한 상당수 구미 학자들의 서술은 아예 접근부터가 다르다. 예컨대 미국 불교학계의 원로이고 시사주간지 &lt;타임&gt;이 “미국의 가장 영향력 있는 25명” 중 한명으로 지정한 로버트 투먼(Robert Thurman) 컬럼비아대 교수는, 그의 최근의 베스트셀러 &lt;내면의 혁명: 생명, 자유, 진정한 행복의 추구&gt;(1999)에서 티베트를 “불교적 통치 아래서 물질에 대한 영(靈)의 승리로서의 진정한 근대성인 내면적인 근대성을 이룬 지구를 구제할 미래형 문명”이라고 부른다. <br /><br /><br /><br />△ 독립지도자 달라이 라마.<br />(사진/ GAMMA)<br /><br />&nbsp;&nbsp;<br /><br />달라이 라마의 “학술적 대변인” 격인 투먼의 경우야 특별하다고 치더라도, 스칸디나비아의 많은 학자들도 중국이나 네팔 등과 전쟁도 치르고 권부(權府) 내부의 폭력적 파벌 투쟁의 경험도 많은 티베트를 “폭력이 존재하지 않는 윤리적 사회”로 여기고 있다. 비서구 지역에 대해 비판적이다 못해 경멸적이기까지 한 서구 학자들도 이처럼 ‘녹아버리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되는가? 대중문화에서 ‘티베트’ 담론은 “진리의 낙토(樂土) 티베트”에 대한 찬양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br /><br />&lt;티베트에서의 7년&gt;이라는 영화를 기억하는가? 이기적이며 냉정한 오스트리아의 산악인 하인리히 하러(실제로 하러는 소신파 파시스트였는데 영화에서는 제대로 언급되지 않는다)가 어린 달라이 라마의 교사이자 친구가 돼서 애타주의와 내면의 평화를 배우고, ‘세계의 영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에게 서구의 문명과 영어를 가르쳐준다. 영화 속의 티베트는 정신적 발전의 별천지로, 1950년 티베트를 침략하여 점령한 중국군은 “마지막 낙원”을 망가뜨리는 악마로 묘사된다. 고급 라마들의 안정된 생활을 받쳐주는 것이 바로 티베트 인구 절반을 차지하던 사찰의 예속 농민이었다는 사실, 농민들이 중세 유럽의 농노처럼 주인에게 가혹한 체형을 당할 수 있었다는 사실, 사찰들이 이자놀이를 벌이는 고리대금업자의 노릇도 겸했다는 기초적인 상식도 반영되지 않았다. 침략 초기에 중국 당국이 달라이 라마 정권을 포섭하여 중앙 정부의 대리인으로 삼으려 한 역사적 사실도 무시당했다. 영화뿐만 아니라 도서 시장에서 범람하는 각종 ‘자기계발’ ‘정신 발전’ ‘요가와 명상’ 같은 책에서 ‘티베트 라마’는 진리를 깨달은 ‘영적 지도자’로 나타나 숭배를 받는다. 도대체 티베트 라마들은 어떤 이유로 이와 같은 파격적인 대접을 받고 있는가? <br /><br /><br />17~19세기 선교사들은 사악하게 묘사 <br /><br /><br />현재의 현상들을 피상적으로 본다면 오리엔탈리즘에 젖은 유럽인들이 티베트를 일종의 예외로 대우해주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대학 강단에서 티베트의 ‘내면적 근대성’이 서구의 ‘외면적 근대성’보다 우월하다는 소리가 들릴 정도라면 그게 오리엔탈리즘의 대척점이 아닐까? 그런데 유럽인들의 티베트관의 역사를 심층적으로 들여다보면 티베트를 우러러보는 그 태도의 내면에 오리엔탈리즘적 요소들과 정책적인 계산들이 내재돼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br /><br />유럽인으로서 최초로 티베트를 정탐한 17~19세기 가톨릭 선교사들은 사찰의 지옥도(地獄圖)나 공포스러운 모습의 호법신(護法神)들의 그림에 경악해 티베트 불교를 중국 불교보다 더 사악하게 묘사했다. ‘라마교’(Lamaism)라는 비칭이 붙은 티베트 불교에 대해서 19세기 말 영국 탐험가들은 “신도들의 복종만을 요구하는 정신적 테러리즘”이라고 혹평했으며, 1904년 영국군의 티베트 침략에 종군해 나중에 &lt;라사의 베일 벗기기&gt;란 베스트셀러를 낸 에드문드 챈들러(Edmund Chandler)는 티베트 승려들을 “미신을 수단으로 혹세무민하여 민중에 악정을 베푸는 무리”로 봤다. 그 “미신”이 “지구를 구할 진리”로 탈바꿈한 것은 1920~60년에 이루어졌다. <br /><br />세계 공황·대전들의 시대에 서구적 근대성에 회의를 느낀 서방 지식인들에게는 폭력의 도가니에서 구해줄 ‘이질적이며 신비스러운 존재’가 필요했는데, 신지파(神智派·theosophy)라는 소수의 신비주의자들에 의해 ‘세계의 영적 중심’으로 해석된 바 있던 티베트야말로 ‘안성맞춤’이었다. 이슬람권과 달리 유럽과 경쟁한 역사도 유럽의 식민 지배를 받은 적도 없는 그야말로 ‘경계선 밖의 오지’, ‘우리’에게 저항한 적이 없는 ‘그들’을 영적 스승으로 받아들이기에 별 거리낌이 없었다. 근대성에 회의를 느낀 지식인들이 신좌파 등 ‘불온 사상’에 빠지기는 걸 방지하려 했던 미국 등지의 주류 보수주의자 입장에서도, 1959년부터 망명하여 대중국 독립 투쟁에 나선 관계로 미 정부의 지원에 의존해야 하는 달라이 라마가 서구 지성계의 ‘스승’이 된다는 것은 걱정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보수적 기독교의 기반이 잠식당하는 것은 안타까웠지만, 같은 ‘동양 스승’인 마오쩌둥이나 호치민보다 낫지 않았겠는가? 또한 무엇보다 티베트는 인도와 중국 사이의 전략적 요충지이다. 이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망명 중인 티베트 정통 지배자들과 서방 지성계 사이의 두터운 연결고리가 필요한 것이다. 그리하여 ‘공포스러운 미신’은 거의 100만명에 이르는 미국인의 신앙·애호의 대상이 되기에 이르렀다. <br /><br />그러면 그 효과로 티베트에 대한 서방인의 태도는 오리엔탈리즘의 테두리를 벗어날 수 있을까? 벗어나는 게 아니라, 비하 위주의 ‘부정적인 오리엔탈리즘’ 대신 낭만적 소비로서 ‘긍정적 오리엔탈리즘’이 서구가 티베트를 보는 프리즘이 된 듯하다. 티베트에 대한 상상은 ‘정체되고 신비스러운 오리엔트’의 패러다임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다. 대상물의 복합성을 무시해버리는 타자에 대한 일차원적 의식의 형태가 원래 그렇듯이 그에는 폭력적인 이면들이 많다. 티베트가 획일적으로 ‘불교의 낙토’로 상상되는 만큼 티베트 토착 종교인 본교 신도들이 몰이해를 당하게 되고,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의 대표자’로서 위치를 점하는 만큼 달라이 라마의 종교적 지도를 받지 않는 가규파(Kagyupa·?擧派) 등 소수 문중들이 소외당한다. 특정 대상물의 숭배적 신비화는 결국 타자에 대한 이해와 포용이라는 불교적 가치에 대한 배반으로 이어질 수 있다. <br /><br /><br />티베트 안에서 소외당하는 사람들 <br /><br /><br />물론 일부 서구인들의 티베트 불교에 대한 감화를 기뻐할 수 있고, 중국과의 협상에서 세계 여론의 카드를 십분 이용해야 할 달라이 라마가 미국 정계와의 어쩔 수 없는 유착도 이해할 일이다. 그럼에도, 티베트 민중을 사랑하는 입장에서 티베트가 단지 구미인의 ‘상상적 이용’의 대상물이자 미 정부의 대중국 정책의 수단이 된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티베트도 여느 다른 지역 못지않게 모순으로 찬 계급사회이며 불평등한 위계질서적 관계나 종교집단, 집권 파벌 사이의 갈등 등의 문제를 안고 있다. 티베트 불교를 존중한다면 티베트 불교의 신비로움을 즐기며 달라이 라마를 숭배하기보다는, 차라리 티베트 불교에서 남녀·승속이 더 평등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그리고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로 죽어가는 셀 수 없이 많은 약자들과 희생자들이 불교의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br /><br /><br />[참고문헌] <br /><br />1. Donald Lopez, Jr., S.,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8. 유럽인의 ‘티베트적 상상’의 허망함을 거의 최초로 깨쳐준 한 불교 학자의 저서. 요점 정리: http://www.press.uchicago.edu/Misc/Chicago/493105.html <br /><br />2. Peter Bishop,, London, 1993. 신지파부터 오늘까지의 ‘티베트숭배’의 역사를 칼 융의 정신분석학적 방법으로 파헤친 책. <br /><br />3. Martin A.Mills,, Routledge, 2003. 라다크 지역의 한 티베트 사찰을 구체적 사례로 승속 사이에서의 역학 관계와 티베트 종교에서 토착적 요소들의 역할을 분석한 책. <br /><br />4. Michael Parenti, Friendly Feudalism: The Tibet Myth,<br />http://www.michaelparenti.org/Tibet.html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에서 티베트 사회 정치사를 분석하여 ‘비폭력적 윤리적 사회’의 신화를 공격하는 논쟁적 글. <br /><br /><br /><br />]]></description>
                        <pubDate>Sat, 03 Jul 2004 12:11:27</pubDate>
        </item>
                <item>
            <title><![CDATA[소작농의 투쟁에서 배운다 / 박노자]]></title>
            <author><![CDATA[한겨레펌]]></author>
            <link><![CDATA[http://www.hongsehwa.pe.kr/zbxe/69046]]></link>
                        <description><![CDATA[<br />‘쿨’해 보이지 않기 때문일까. 1980년대의 인기 테마이던 일제하의 농민 투쟁사는, 요즘에 들어와서 관심의 영역에서 사라지는 듯하다. 나로서는 이를 참 아쉽게 여긴다. 표면적으론 일제 시대와 우리의 상황이 달라 보이지만, 민중이 처한 현실과 그 타개책들이 어떤 면에서 아주 비슷하기 때문이다. <br />일제 지배의 형태로 조선이 전성기의 제국주의의 세계 체제에 편입되었을 때, 지배층과 민중이 체감하는 현실은 정반대였다. <br /><br />일제의 토지조사로 전답에 대한 사유권을 보장받은 재산층은 이른바 ‘국제화’ 시대를 구가했다. 이들은 신학문과 새로운 소비품으로 권위를 과시했을 뿐 아니라 자녀들은 일본으로 유학을 보냈다. 부유층의 이러한 ‘안정’의 대가는 민중의 ‘불안정성의 증대’였다. 1910년대 말에 조선 농가의 약 40%가 소작농이었는데, 소작의 여건은 조선시대의 사정에 비해서 크게 나빠졌다. 5할 미만이었던 소작료가 6~7할로 고율화된 것도 고통이었지만, 가장 아픈 문제는 소작의 ‘비정규화’에 있었다. 조선시대에 소작농은 요컨대 ‘평생 고용자’였다. 특별한 이유 없이 추방당하지 않았으며 보통 소작권을 자손에게 대물림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에 반하여 근대화는 소작농에게 계약 관계를 강요했다. 기한이 명시된 계약의 70%는 계약기간이 1년이었고, 20%는 2~5년이었기에 소작권을 빼앗기지 않으려면 지주와 마름의 횡포를 감수하고 무보수 노동을 요구대로 해주어야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비정규성’은 인간의 권리와 존엄성의 박탈을 의미하는 것이다. ‘비정규직 농민’의 ‘무단 해고’(소작권 이동 등)는 식민지 시대의 전체 소작 쟁의의 약 절반의 원인이 될 만큼 농촌의 가장 아픈 상처 중의 하나였다. <br /><br />아이엠에프 환란 때 지배층의 ‘협력’으로 한국이 후기 제국주의의 금융자본의 수탈 체제 아래로 들어간 뒤의 사정은 어떠했던가 <br /><br />이른바 재테크로 짭짤한 소득을 올리는 부유층은, 1910~20년대와 별 다르지 않게 ‘국제화’의 혜택을 누리게 됐다. 차원이 달라진 것은, 이제는 자녀를 단순히 유학 보내는 것이 아니라 태평양을 건너가 낳음으로써 태생부터 ‘내지’의 시민으로 만들거나 어렸을 때부터 ‘내지’로 보내 ‘자랑스러운 내지인’으로 키우는 형태가 됐다는 점이다. ‘조선인’이라는 범주를 벗어버리고 식민 모국의 ‘일등 시민’이 되는 것은 일제 하의 토착 지배층들의 소원이었는데, 아이들로 하여금 ‘미국인’의 대열에 합류하게 하는 그 후예들이 선조의 한을 풀어주고 있는 셈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현대판 머슴들의 사정이 어떻게 달라졌는가 <br /><br />환란 이후의 변화들은 그들에게 역시 일제 초기처럼 ‘불안정성의 증대’를 의미한다. 공장·연구소의 머슴은 이제 조선시대의 온정주의를 본딴 개발독재 시대 식의 ‘식구’(평생 고용인)는 아니고 언제나 ‘편하게’ 해고될 수 있는, 그래서 늘 눈칫밥을 먹고 살아야 하는 일회용 잡직들이다. <br /><br />일제 하의 민생 파탄에 궁핍과 불안의 지옥으로 내몰린 소작농들이 어떻게 대응했는지 근·현대사를 배운 사람이라면 익히 알 것이다. 1920년대 초반에 쟁의 참가자는 많아봐야 수백명을 넘지 못했지만, 1935년에 이르러서는 거의 6만명의 소작농들이 소작권 안정화를 비롯한 여러 요구를 내걸고 투쟁에 나섰다. 경제적 투쟁이 발단이 되어서 1930년대 초반부터 공산주의자 등 정치투쟁 단체들의 지도를 받는 ‘혁명·적색 농민 조합’들은 함경도, 전라도 등지에서 농촌의 진보화를 도모했다. 그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일제를 몰아내고 사회주의를 건설하지 못했지만 이와 같은 밑으로부터의 압력이 있었기에 결국 남한의 극우정권도 농지 개혁을 단행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우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경제적 투쟁과 아울러 본격적인 변혁을 위한 정치투쟁이 대중화돼야 노동자의 절반 이상을 ‘불안의 노예’로 만든 이 체제에 의미 있는 변화가 생길 것이다. <br /><br />박노자/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br /><br />]]></description>
                        <pubDate>Mon, 26 Jul 2004 12:40:16</pubDate>
        </item>
                <item>
            <title><![CDATA[마음을 파괴하는 사회]]></title>
            <author><![CDATA[마담]]></author>
            <link><![CDATA[http://www.hongsehwa.pe.kr/zbxe/69047]]></link>
                        <description><![CDATA[[한겨레펌]<br /><br /><br />3살 난 아들과 함께 종종 텔레비전의 어린이 만화를 본다. 대부분의 어린이 만화에는 정의로운 ‘주인공’(들)이 ‘악당’을 물리치는 각종 장면이 나온다. 거친 충돌 장면이 보일 때, 신기하게도 아이는 당황하거나 인상을 쓰며 텔레비전을 향해 “그럼 안돼. 저 사람 아파!”라고 한다. <br />제작자들은 그런 폭력적인 장면들이 동심에 맞는다고 판단한 걸까. 그래야 흥행이 될 거라고 계산한 걸까. 그러나 오히려 폭력에 익숙하지 않은 아이들에게 이와 같은 장면들은 정서불안, 불쾌감, 공포감 등을 주게 된다. 인간이 폭력 능력을 보유함에도 불구하고 동심은 내재적으로 폭력적이지 않다는 뜻이다. <br /><br />나는 폭력 장면에 어두워지는 아이의 표정을 보며 문득 이라크 침략을 떠올렸다. 아름다운 도시를 부수고, 희생자의 수와 포로 고문을 자랑으로 삼고, 지나가는 아이들을 재미삼아 쏘아 죽이는 미군들도, 시간을 돌이켜 두세 살 때는 영상적 폭력에 불안해하는 착한 유아가 아니었을까? 어렸을 적 세상을 환한 웃음으로 대했을 법도 한 그들이 어떻게 해서 천진난만한 ‘눈망울’을 잃게 됐을까? <br /><br />물론 직접적인 원인은 대다수가 하층민인 그들에게 가난 탈출의 기회를 따로 주지 않는 미국식 자본주의의 ‘정글법칙’이다. 그리고 폭력에 대한 그들의 거부 의식을 마비시킨 것은 대물림 가난에 찌든 빈촌의 ‘폭력 영웅화’의 분위기와 이를 이용하는 군대 찬양 일색의 텔레비전 프로파간다이다. 그러나 경제·미디어 영향만으로 고용 살인자 만들기 과정이 다 설명될 수 있을까? 예비역 군인이나 장교, 전쟁을 반기고 찬양하는 중산층 이상의 미국 극우파는 단순히 배가 고프거나 프로파간다에 휘말려서 폭력주의자가 된 것이 아니다. 그들과 그들의 가난뱅이 출신 하수인들은 훨씬 더 일찍, 본격적인 차원에서 인간성을 잃기 시작했을 것이다. <br /><br />국가적 살육은 폭력성의 극단적인 형태지만 전쟁 이외에 자본주의 세계에 내재돼 있는 폭력 장치들은 무수하다. 예컨대 사회적 자원(신분상승, 위신 등)을 놓고 벌이는 경쟁은 인간의 폭력화에 가장 많이 기여하는 제도적 폭력의 형태다. 학교에서의 성적 경쟁도 ‘남들은 다 잠재적인 적’이라는 폭력적 의식을 주입시키지만, 유치원 때부터 하는 대항적인 스포츠도 경쟁이라는 형태의 규범화된 폭력을 내면화시킨다. 운동이야 신체·정신적으로 필요하지만, 왜 꼭 남과 싸워서 승패를 가리는 운동을 정상적인 것처럼 가르쳐야 하는가? 몸의 움직임 자체와 과정을 즐기고 경쟁을 생각지 말라고 하면 안되는 것인가? 그러나 사회는 신체적 경쟁을 당연지사로 가르칠 뿐 아니라 대자본의 돈벌이일 뿐인 올림픽·월드컵과 같은 국가 대 국가의 상징적 대항전을 전지구적 볼거리로 만든다. ‘싸워서 이긴’ 자가 영웅이라는 허구를 어릴 때부터 진리인 양 착각하게 된 사람들이 폭력을 아파하는 어린아이의 본성을 간직할 수 있겠는가? 장성하여 경우에 따라 본인의 노력으로 폭력사회의 본질에 대한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평생 ‘국가’ ‘군대’ ‘성공’의 신화에 묻혀 살 가능성이 훨씬 크다. 몸이 멀쩡하다 해도 남을 걱정하는 측은지심을 잃어버린 마음은 죽은 거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br /><br />“큰 사람은 어렸을 때의 마음을 잃지 않는다.”(大人者 不失其赤子之心者也: 맹자) <br /><br />우리가 어릴 적 양심을 되찾고 우리의 아이들이 텔레비전 뉴스에서 볼 수 있는 미제 고용 살인자처럼 되지 않도록, 어릴 때부터 아이의 본성에 따르는 경쟁이 없는 교육을 시킬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남의 아픔이 바로 내 아픔이라는 것을 근본으로 가르치는 교육이야말로 인간이 살 만한 사회를 만드는 일이다. <br /><br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br /><br /><br /><br /><br />]]></description>
                        <pubDate>Mon, 23 Aug 2004 03:37:18</pubDate>
        </item>
                <item>
            <title><![CDATA[“색깔 있는 자”도 품을 수 있는]]></title>
            <author><![CDATA[한겨레펌]]></author>
            <link><![CDATA[http://www.hongsehwa.pe.kr/zbxe/69026]]></link>
                        <description><![CDATA[<br />외국에 오래 살아도 마음이 동화되지 못하고, 북한과의 오랜 인연에도 유일사상에 용해되지 못하고 …. 어디에서도 집단의 확고한 일원이 되지 못한 경계인 송두율은 꿈에도 그리웠을 고국에 가자마자 조사, 심문, 구속까지 당하게 되었다. 인생의 절반 이상을 이역에서 보낸 사람에게 그간 쌓인 한을 풀 시간도 주지 않고 자신의 모든 것을 ‘설득력 있게’ 부정하라고 강요하는 중세 종교 재판관풍의 공안꾼들에게 인간의 마음이 있는가 의심하게 된다. 그가 왜 남한의 인권적 성숙을 과대평가하고 갔는지 아쉽기도 하고, 이 소식에 아연실색하는 유럽의 지식인들 앞에서 당황하기도 했다. 복잡한 이 세상을 흑색과 백색만 보이는 특유의 색안경을 끼고 다니는 자들은 역사에서 유감스럽게도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고 있다. <br /><br />“우리는 절대선, 그들은 절대악” 식의 배타주의의 제단에 바쳐진 첫 경계인은 누구인가 불자가 신라의 공민이 될 수 없다고 해서 죽음을 당한 이차돈에 대한 기록은 다분히 설화적이니, 가까운 18세기 말을 생각해 보자. <br /><br /><br />‘사학’(邪學: 천주교)을 금하는 법이 오늘날의 국가보안법만큼 살벌했던 그 시절, 학구열이 강한 이승훈(1756~1801)이라는 젊은 선비가 사행 편에 중국으로 ‘잠복’하고 거기에서 ‘반국가 단체’ 격인 서양 신부들과 회합하고 ‘노동당 가입’쯤 되는 영세·입교를 했다. 비서구 문화들에 대한 상당한 배타성을 보였던 가톨릭 교회와 전통적 유교 문화의 경계에서 배회하고 고뇌했던 그였지만, 고문 끝에 그를 죽인 노론 지배자의 ‘공안’ 담당관들에게 그는 ‘거물 간첩’일 뿐이었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두 명의 ‘반국가 분자’(순교자)가 난 집안에서 태어난 김대건(1822~1846)도 중국으로 ‘잠입’해 거기에서 ‘간첩 교육’(선교사에게 라틴어와 서양 학문을 익히는 것)을 받은데다 ‘노동당 간부’(가톨릭 신부)까지 된 혐의로 역시 고문 끝에 죽는다. 오늘날에 가톨릭 신자들에게 이승훈, 김대건 두 사람은 ‘성현’의 대접을 받고 교인이 아닌 필자에게도 그들은 신앙의 자유와 인권의 확립에 공헌을 세운 영웅으로 인식된다. 두 문명 사이에서 살다 본인의 뜻대로 신앙생활을 할 권리를 얻기 위해 고통을 받고 죽은 두 사람을 존경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br /><br /><br />한두 세기가 지나고 우리 후손들은 경계인 송두율과 그를 박해한 자들을 과연 어떻게 기억할까 천주교를 박해했던 노론 귀족들은 바깥 세계를 몰랐고 유교 지상주의와 같은 유아독존적 통념에 사로잡혔다는 정상 참작을 해줄 수 있어도, 송두율이 북한 노동당에 가입해도 괜찮아할 독일을 ‘선진국’으로 숭배하고 있는 한국 극우들의 죄악은 몇 배로 무겁게 평가될 것이다. <br /><br /><br />물론 탈세속적인 요소가 중심이 되는 보편주의적 종교와 ‘민족적 특수성’ 중심의 북한 주체 사상이라는 극단적인 근대화 이데올로기를 표면적으로 비교한다는 것은 무리이다. 그러나 문제는 ‘타자’를 ‘이단’으로밖에 볼 줄 모르는 단순하고 광적인 배타주의적 태도다. 우리나라에서 현재 이러한 태도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 대표적인 소수 집단은 수배 조처로 아플 때 병원에 갈 수도 없고 아픈 부모를 돌볼 수도 없는 한총련 학생들이다. 독일 국적 소유자이자 국제적으로도 알려져 관심거리가 될 수 있는 학자인 송두율과는 달리 대부분이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한총련의 힘없고 사회적으로도 소외된 학생들에 대한 폭력과 인권유린은 어디까지 가능한가 그리고 북한의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하지도 않은 고민의 화신인 송두율마저 껴안을 줄 모른다면 진짜 주체사상 신봉자들을 어떻게 껴안고 화해와 통일로 갈 수 있을 것인가 <br /><br /><br />통일을 위해서도 이 땅에 진정한 개인주의적, 민주주의적 사회가 성립되기 위해서도 송두율에게 관용이 반드시 베풀어져야 된다. <br /><br /><br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br /><br /><br /><br /><br />]]></description>
                        <pubDate>Sun, 11 Jan 2004 15:09:55</pubDate>
        </item>
                <item>
            <title><![CDATA[[세계와 한국] ‘바보상자’를 산 것은 실수였다]]></title>
            <author><![CDATA[nadja]]></author>
            <link><![CDATA[http://www.hongsehwa.pe.kr/zbxe/69027]]></link>
                        <description><![CDATA[<한겨레21> 2004년01월08일 제492호<br /><br />‘바보상자’를 산 것은 실수였다<br /><br /><br />진정한 인간적 가치보다 ‘적대적 타자 만들기’를 교육하는 텔레비전 중독의 결과들 <br /><br />필자는 한국에서 살 때 직장에서 가끔 텔레비전을 보기는 했지만 집에는 ‘바보상자’를 아예 두지 않았다. 차라리 독서를 하거나 가족과 시간을 보내는 편이 낫다는 믿음 때문이기도 했지만, 한편 국내 텔레비전의 수준을 아쉽게 여기는 면도 있었다. 뉴스에서 유죄 판결도 나지 않은 경찰에 검거된 시민을 범인인 양 포승에 묶여 고개를 숙인 채로 보여주는 것이나 향락과 허영심을 부추기는 프로그램들과 광고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특히 사극에서 왕과 왕비들은 많이- 그리고 왜곡되게- 등장해도 수많은 일반 백성은 아역 이상 되지 않는 모습 등을 보면서 텔레비전 살 생각이 별로 들지 않았다. <br /><br /><br /><br />△ 텔레비전 영상이 아이들 언어의 근간이 되는 상황에서 텔레비전 이미지들을 모르는 것은 ‘절대적 타자되기’를 의미한다.<br /><br />&nbsp;&nbsp;<br /><br /><br /><br />어릴 때부터 ‘방송의 식민지 백성’으로 <br /><br /><br />그러나 노르웨이에 와서는 언어도 익혀야 하고 사회에 대한 정보원도 필요하기에 텔레비전을 샀다. 더군다나 필자가 사는 오슬로 지역에서 노르웨이 방송뿐만 아니라 스웨덴과 영국, 그리고 일부 미국 채널까지 시청할 수 있기에 말이다. 그리고 아직 두살이 채 안 된 필자의 아이가 나중에 노르웨이어를 익혔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그러나 여러 방송 채널을 어느 정도 알게 된 이 시점에서 기대보다 우려가 앞선다. 언어 습득에 도움이 될는지 모르지만 아이가 노르웨이 ‘바보상자’의 이미지들을 보면서 과연 어떤 영향을 받을지 의문이 가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북구 방송의 폐단은 구체적인 모습은 달라도 그 태심함은 어쩌면 한국 이상일 것이다. <br /><br />텔레비전에 대한 대중적 중독의 전체적 모습은 한국, 노르웨이, 미국이 크게 다르지 않다. 성인의 하루 평균 텔레비전 시청량은 노르웨이에서 약 3시간30분, 미국에서 4시간, 한국에서 2시간30분(일요일에는 3시간40분)이다. 그 이유는 한국이 서방보다 노동시간과 필연적 사회자본 축적(회식 등등)에의 투자시간이 더 길고, 노르웨이 사람들이 미국인보다 독서시간이 더 길다는 등의 지역적인 특성들도 나타나지만, 크게 봐서는 방송 자본에 의한 ‘여가의 식민화’ 현상이 똑같다는 것이 많은 전문가들의 견해이다. <br /><br />방송의 ‘식민지 백성’으로 자라는 것은 어릴 때부터다. 미국의 경우 평균적으로 한살 된 유아는 이미 일주일에 약 6시간 동안 은색 화면에 붙어 있다(이 나이에 텔레비전을 시청하면 시력 감퇴 등 많은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서구에서 10대가 되면 텔레비전 앞에서 보내는 시간은 일주일에 거의 20시간으로 늘어난다. 초등학생들은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보다 텔레비전 앞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다. 텔레비전 시청은 ‘없으면 절대로 안 될’ 식사나 잠과 같은 일과의 일부분으로 자리잡고 인기 프로그램을 모르는 아이는 친구 사이에서 왕따당하기 십상이다. <br /><br /><br /><br />△ 텔레비전이 세계의 진정한 모습들을 보여줬다면 자본주의라는 세계적 흡혈 체제의 기반이 과연 오래갔을까?(AP연합)<br /><br /><br /><br />텔레비전의 영상이 아이들 언어의 근간이 되는 상황에서 텔레비전의 이미지들을 모르는 것은 언어 불통, 즉 ‘절대적 타자되기’를 의미한다. 북한을 지원하는 노르웨이 적십자사의 현지 파견원의 입장에서 ‘주체사상’을 하루 3~4시간 동안 학습하지 않으면 안 될 북한의 학생들이 불쌍하기 짝이 없는 존재로 보인다면, ‘바보상자’를 보지 않으면 그 결과로 평생의 상처를 받을 수 있는 노르웨이 아이들은 과연 자유인으로 자라고 있는가？ <br /><br />여기쯤 되면 아마도 텔레비전 시청이 아이의 인성 계발에 그렇게까지 장애가 될 일이 있느냐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물론 공영방송에서 광고가 금지되고, 미국과 달리 유아를 위한 특수 프로그램의 비율이 그대로 유지되거나 늘어나는 노르웨이 텔레비전은, 전국민의 우민화를 목적으로 하는 이탈리아나 러시아의 텔레비전과 비교하자면 꽤나 건전해 보인다. 이탈리아는 미디어 재벌 베를루스코니가 총리가 된 상황에서 섹스와 스포츠 위주의 민영 텔레비전이 지배하고, 러시아는 <특무부대>라는 제목의 체첸 독립군 토벌에 관한 선전적 국책 영화가 청년층의 인기작품으로 떠오르고 있는 현실이다. <br /><br /><br />점점 심화되는 영상의 폭력화 <br /><br /><br />그렇다고 해서 노르웨이 방송에 교육자의 역할을 맡겨도 될까？ 영화산업이 취약해 자국 제조 영화들의 시장점유율이 10%도 안 되는 노르웨이에서는, 텔레비전의 대다수 유아 시청용 만화는 미국이나 일본 등지에서 만든 ‘국제적 주류 작품’들이다. ‘악당 징벌’ ‘목숨 건 사투’ ‘사활 건 경쟁’은 이들 만화의 주된 주제에 속한다. 미국의 평범한 액션영화 정도면 노르웨이 채널만 해도 일주일에 몇번씩이나 구경할 수 있다. 화면에서의 폭력이, ‘현실’과 ‘연출’을 뚜렷하게 구분할 줄 모르는 4~5살의 아이들에게 과연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 필자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자면 영화상의 전쟁에서 ‘죽은’ 군인이 하도 불쌍해서 눈물을 흘린 일이 기억나고, 텔레비전에서 하도 자주 구경해온 ‘소련군과 파시스트 독일군의 전쟁’을 모방해서 폭력적인 전쟁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내던 친구들도 기억난다. <br /><br />그러나 영화에서의 ‘의롭고 멋있는’ 폭력의 모방만이 문제인가？ ‘악당 징벌’을 주된 테마로 하는 만화나, <라이언 일병 구하기>처럼 제국주의적 살육인 제2세계 전쟁을 극도로 낭만화 또는 미화하는 교묘한 선전 영화를 보고 자란 아이라면, 전쟁이 의로울 수 있다는 제국주의의 신화를 믿을 확률이 크다. 즉, 미 제국이 이라크 다음 타깃을 찾아 또 새로운 제3세계 주민들을 대량으로 살육할 때, 그들에 대한 폭격을 마치 재미있는 온라인 게임처럼 보여주는 뉴스를 시청할 필자의 아이로부터 “아빠, 저것 봐. 아군이 악당들을 잘 때려 부숴버리잖아!”와 같은 소리를 들을 가능성이 있다. <br /><br />미국의 의사협회(AMA)가 1976년에 “영상 폭력이 아이들의 건강에 해롭다”는 내용의 결의를 채택했어도, 미국의 여론조사 응답자 중 73%가 “텔레비전 폭력이 청소년 범죄를 부추긴다”는 반응을 보여도, 영상의 폭력화는 해마다 점점 심화되기만 한다. 전문가들의 의견과 민심에 대한 이와 같은 국가·자본의 무시는 미국이 전 세계에 확산시키겠다고 큰소리치는 ‘민주주의’의 내용인가. <br /><br />그런데 18살이 될 때까지 서방세계의 평균 청소년이 봐야 할 약 1만6천건의 화면 속에서의 살인 장면만 문제가 아니다. 긴장감과 역동성으로 인해 소년·소녀·청소년들에게 인기가 높은 스포츠 프로그램이 주는 영향은 무엇인가？ 경합하는 양쪽이 하나의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승패보다 전체의 흥 돋우기에 더 열중했던 전통시대의 씨름과 같은 마을놀이와 달리, 오늘의 산업화·프로화된 스포츠는 말 그대로 ‘경쟁’ ‘승자 독식’(winner-takes-all) 구조의 상징적 표본이다. 근대적 스포츠에서 경쟁자는 그야말로 밟고 올라가야 할 대상물, 즉 ‘적대적 타자일 뿐이지 인간적인 연대를 느낄 존재는 아니다. <br /><br /><br />스포츠 프로그램이 가르치는 것 <br /><br /><br />신자유주의자들이 찬양하는 ‘합리적 시장의 모델’을 꼭 닮은 이 스포츠 프로그램에 열중하면서 자란 아이는 포용·양보·지족(知足)·연대 등의 진정한 인간적 가치를 잘 배울 수 있을까 더군다나 스포츠 프로그램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것은 국가 대 국가 항전 식의 국제 경합이 아닌가 ‘우리’와 ‘남’의 전력전을 보고 자란 아이는 나중에 국가에 대한 자신의 소속감이 자연발생적 정서가 아니라 지배층의 헤게모니 전략 중 하나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을까？ <br /><br />칼이 수술의 도구로도 범죄의 흉기로도 동시에 이용될 수 있는 것은 사물의 이치이며, 문명 이기들을 인류 야만화의 흉기로 사용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본질이다. 비행기라는 인류의 위대한 발명은 반대편에서는 폭격기의 모습으로 제3세계 피침 지역 주민들의 악몽이 되고, 우주 인공위성은 펜타곤의 세계 통제와 침략의 주된 도구 중 하나가 되었다. <br /><br />텔레비전도 마찬가지다. 만약 서방의 주요 방송채널들이 하룻동안이라도 서구·미국·일본·한국 등의 남성 관광객의 성적인 만족을 위해 12살 나이에 빈민 부모의 품을 강제로 떠나 인신매매와 성폭행을 당하는 타이 소녀들의 눈물이나, 월드컵 등의 ‘우리’의 축제에 사용되는 축구공을 만드는 인도·파키스탄 어린이들의 손 등 이 세계의 진짜 모습을 대중매체들이 제대로 보여주었다면 자본주의라는 세계적 흡혈 체제의 지지 기반이 과연 오래갔을까？ <br /><br />그러나 오늘의 텔레비전은 자본 논리에 따라 자본 제국의 선량한 ‘황국신민’을 만드는 것이지, 체제로부터 독립할 줄 아는 개인을 만들자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래서 아이를 키우는 부모의 입장에서 생각할 때, ‘바보상자’를 산 것이 실수였다는 생각은 자꾸 든다. <br /><br /><br />[참고 사이트]<br />1. 아이들의 텔레비전 시청의 해로움을 설명하는 사이트: http://www.tvturnoff.org<br />2. 미국의 가족과 미디어 연구소: http://www.mediafamily.org/<br />3. 미국의 국립 소아과의학 아카데미의 영상 폭력에 대한 선언서: http://www.aap.org/advocacy/releases/jstmtevc.htm<br />4. 아이들에게 미치는 미디어의 영향 종합 분석: http://www.aap.org/family/mediaimpact.htm<br />5. 미디어에 대한 비판적 분석: http://www.mediawatch.com/ <br /><br /><br />박노자 | 오슬로국립대 교수 · <아웃사이더> 편집위원<br />]]></description>
                        <pubDate>Tue, 13 Jan 2004 18:50:12</pubDate>
        </item>
                <item>
            <title><![CDATA[성형수술, 혹은 욕망의 노예화 / 박노자]]></title>
            <author><![CDATA[martina]]></author>
            <link><![CDATA[http://www.hongsehwa.pe.kr/zbxe/69028]]></link>
                        <description><![CDATA[<br /><br />근·현대 한국의 사회사를 보면 지난 100년 동안 여러 가지 변화 양상들 중에 크게 돋보이는 것이 성형수술이다. 만약, 부모로부터 받은 신체발부를 귀중히 여겨 절대 손상하면 안 된다고 믿어 단발령에 목숨까지 내걸고 저항했던 조상들이 머리털은 물론 얼굴까지 뜯어고치는 요즘 사람들을 본다면 어떻게 생각할까 물론 몸에 대한 유교적인 외경이 사라져 버린 것은 개인이 신체에 대한 결정권을 얻었다는 의미에서 자유의 진일보이다. 그런데 한국이 세계에서 성형병원의 영업이 가장 잘 되는 곳으로 변해 버린 것은 과연 ‘개인의 자유’의 발전일 뿐일까 오히려 심층적인 차원에서 ‘예속의 심화’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br />성형수술을 결심한 이들에게 “실패나 부작용의 위험과 빚을 지면서까지 왜 하려고 하는가”를 물어 보면 “나도 만족스럽겠지만 예뻐지면 무엇보다도 취직 문이 넓어진다”는 대답을 많이 듣는다. 나의 진로를 좌우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이들의 내 외모에 대한 평가를 의식해서 성형을 한다는 것은 성형이 단순히 ‘신체에 대한 결정권의 행사’라기보다는 오히려 사회적 압력에 의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신체발부를 종교적으로 인식하는 것도 ‘자유’라 볼 수 없겠지만 남의 눈을 생각해서 얼굴을 뜯어고친다는 것이 더욱 심한 ‘예속’을 의미하지 않는가 <br /><br />그런데 문제는 성형수술의 결정에서 예속의 원인을 단순히 ‘직접적인 외부 압력’으로 한정시킬 수만은 없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예뻐지고 싶다’는 생각을 통상 자연스러운 욕망의 발로로 간주하지만 보다 심층적으로 해부해 보면 그렇지만 않다. 육체미에 대한 선망은 인류의 영원한 욕망이지만 성형으로 이어지는 우리의 ‘마음’은 구체적으로 어떤 욕구를 뜻하는가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예쁨’의 기준은 대부분 구미의 매체 자본이 정형화시킨 서구적인 이목구비의 ‘미’이다. 이 ‘미’에 대한 욕망을 자극하는 데는 스포츠신문이나 잡지, 그리고 텔레비전 등 국내의 상업적인 매체들이 주도적인 구실을 한다. ‘미’의 기준은 보는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는 극히 개인적인 영역인데, 우리의 미인관을 작고 갸름한 얼굴, ‘백인처럼’ 높은 코와 늘씬한 몸집 쪽으로 ‘획일화’시켜버린 주범은 선조들이 신주단지를 모셨던 이상으로 서구를 모시고 있는 매체 자본들이다. ‘예뻐지고 싶다’는 말을 사회과학 쪽으로 해석한다면 서구 중심의 세계 체제와 지역적인 대리인들이 ‘표준’으로 삼는 신체 모델에 내 몸을 무조건 맞추려는 ‘체제(!)에 순치된 욕망’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위대한 마르크시스트였던 안토니오 그람시가 지배체제 규칙의 내면화와 이에 따르는 자발적인 복종을 ‘체제의 정신적 헤게모니’라는 용어로 개념화했을 때 그는 바로 이와 같은 현상을 이야기한 것이다. 서슬이 퍼렇던 일제 말기에 창씨개명한 사람들을 우리는 통상 ‘훼절한 인물’이라고 보는데, 남의 나라 총칼이 무서워서도 아니고 남의 나라의 지배적인 욕망이 머리와 마음속에 주입돼서 이름도 아닌 얼굴까지 갈아치우는 우리들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훼절’이라는 말마저도 맞지 않는 이유는 구미 자본이 유포하는 ‘미’의 이미지를 보편적인 것으로 믿는 사람에게는 이미 훼상할 수 있는 ‘절개’조차 없기 때문이다. 진정한 ‘절개’는 외물에 의해서 바뀌지 않는 나만의 영역, 즉 다양한 개인의 궁극적인 자유를 이야기하는 것인데 이러한 우리들이 ‘절개’를 가진 자율적인 개인들이라 할 수 있을까 매판적인 매체의 충성스러운 소비자이자, 주인이 던져 놓는 먹이를 주워 먹는 정신적 노예와 크게 다르다 할 수 있을까 <br /><br />국토로 쳐들어와 물리적으로 짓밟는 외세들을 퇴치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욕망에 대한 개인의 주권을 회복하기는 훨씬 더 힘든 일일 것이다. <br /><br />박노자/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br /><br /><br /><br /><br />]]></description>
                        <pubDate>Sun, 08 Feb 2004 13:26:19</pubDate>
        </item>
                <item>
            <title><![CDATA[1900년대 조선, 양계초에 반하다 / 박노자]]></title>
            <author><![CDATA[한겨레21]]></author>
            <link><![CDATA[http://www.hongsehwa.pe.kr/zbxe/69029]]></link>
                        <description><![CDATA[개화파들에게 크나큰 영감 주었던 ‘근대의 교사’… 뒤늦게나마 서구의 야만성을 몸소 느끼고 폭로 <br /><br />양계초(梁啓超·1873~1929).<br />타고난 글재주로 1895~98년간 청나라의 유식층들에게 “중국이 살아남으려면 반드시 자강(自强)하여 유럽의 법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이치를 설파하고, 위로부터의 서구화가 좌절된 1898년에 일본에 망명한 뒤 1911~12년의 중국혁명 전까지 초인간적인 집필·언론 활동으로 ‘동아시아 자강론의 원조’의 위치를 굳힌, 이 광둥성(廣東省) 선비는 1900년대 조선의 개화파들에게 과거의 주자(朱子)와 비교될 만한 대접을 받았다. <br /><br /><br /><br />△ 1898년 일본에 망명한 뒤 중국혁명 전까지 초인간적인 집필 · 언론 활동으로 ‘동아시아 자강론의 원조’ 위치를 굳힌 양계초.<br /><br />&nbsp;&nbsp;<br /><br /><br />조선 독립운동에 열렬한 찬사 <br /><br /><br />근대 서구적 의미의 ‘애국’ 개념을 조선에 소개한 그의 ‘애국론’(愛國論)이 &lt;황성신문&gt;과 &lt;독립신문&gt;에 게재된 것은 1899년이었다. 그리고 조선의 주권이 빼앗기기 시작한 1905년부터는 그야말로 ‘양계초 붐’이 일어났다. 안창호 등 근대 학교 설립자들은 양계초 소설과 논문들을 한문 독본으로 쓰고 신문·잡지들도 양계초의 글들을 번역해 실었다. &lt;이태리건국삼걸전&gt;(伊太利建國三傑傳·1902)의 4종류 번역판 중 하나는 신채호가 내고, 초기 교육 개혁의 청사진인 &lt;학교총론&gt;(學校總論·1896)의 번역은 박은식이 맡고,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미래를 논하는 양계초의 여러 글들은 장지연이 옮겨 &lt;중국혼&gt;(中國魂)이라는 단행본으로 내었다. <br /><br />원로급들은 물론, 문일평이나 최남선 등의 차세대 문화 운동가들도 양계초의 글들을 번역·게재해 그를 ‘근대의 교사’로 생각했다. 유럽 언어를 제대로 해독하지 못해 ‘서구’를 일본의 대중 저서를 통해서 배운 ‘이차적 번역에 의거한 근대주의자’ 양계초. 그가 인기를 끈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서구·일본의 사상가와 달리 근대 서구 이론들을 중국 고전에 빗대어 전통에 가까운 방식으로 설명한 양계초의 독특한 스타일과, 서구 제국주의자들의 야망을 중국 애국자의 입장에서 비판적으로 해부한 것은 일제 침략을 당하는 나라의 애국자들에게 가깝게 와 닿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br /><br />무엇보다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면 속히 구(舊) 사상의 구속에서 벗어나 과거의 ‘백성’을 애국적인 ‘국민’으로 만들어 서구·일본과 같은 부국강병의 길로 가야 한다는 양계초의 사회진화론적인 논리는 조선 신지식인층의 집단 이데올로기로서 안성맞춤이었다. “우리가 가르치는 대로 바꾸지 않으면 망국과 멸종을 당한다”는 이야기는, 보수파와의 헤게모니 쟁탈전에서도, ‘계몽의 대상물’로 자리매김되어진 민중의 설득과 동원을 위해서도 절실히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제국주의 국가들을 학습해 닮아야 한다는 논리는 결국 제국주의에 대한 지적인 항복을 의미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을 그 당시에 찾아보기란 쉽지 않았다. <br /><br />한국의 1920년대나 1980년대가 ‘마르크스의 시대’, 1990년대가 푸코 등의 ‘포스트’ 담론들의 시대라면, 1900년대는 분명히 ‘양계초의 시대’였다. 그러나 한국이 흠모한 서구 사상가와 달리 양계초는 한국을 무관심해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조선관(觀)이 ‘조선은 원래 중국화된 중국의 조공 국가’라는 제국 의식에 젖은 부분도 있었지만, 그의 애독자였던 1900년대 지사들의 독립운동에 열렬한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안중근 의거의 소식이 알려지자 양계초가 감동을 받아 “남아의 죽음을 어찌 말하리오? 나라의 치욕을 씻지 못하면 어찌 이름을 이룰 수 있는가?”라는 말로 끝나는 감격적인 한시를 지었으며, 김택영 등의 한국 망명객과 어울려 한국 문집 간행을 돕기도 했다. <br /><br /><br />유럽여행에서 ‘환상’을 깨다 <br /><br /><br />1910년 한일 합방이 되자 양계초의 저술 대부분은 금서가 됐다. 일본의 침략을 비판한 것도 문제였지만, 그의 저서가 독립운동가들의 필독서라는 사실은 일제의 가장 큰 우려 사항이었다. 그러나 양계초의 글이 서점에서 사라졌음에도 지식인들은 격분에 찬 ‘애시객’(哀時客·양계초 아호 중 하나)의 논설을 은밀히 읽었다. “자유(즉, 민족 독립)는 천하의 원리”란 양계초의 말은, 자유 없는 시대의 많은 지식인들의 기도문이 된 것이다. <br /><br />식민지 지식인 대다수가 알 수 없었지만, 1910년대에 양계초는 언론인에서 몇년간 정치인으로 변신했다. 중화민국이 설립되자 그는 진보당이라는 서구 지향적인 온건 보수 정당의 당수, 법무부 장관, 중앙은행 총장 등 주요 요직을 거쳤으며, 황제가 되고자 했던 원세개(袁世凱) 대총통의 야심을 꺾는 데 앞장섰고, 제1차 세계대전에 중국이 연합국(영국·프랑스·미국 등) 편에 서게끔 내각에서 로비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연합국들의 승리가 예상되는 상황에서 이 틈을 타 중국의 숨통을 옥죄는 온갖 불평등 조약들을 취소하기 위해서였다. <br /><br />그의 예상대로 전쟁이 1918년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 중국이 파리 강화회의에서 한 자리를 확보하게 되자, 그는 중국 대표단의 고문 자격으로 프랑스로 떠났다. 1900년대 중국·한국 독자들에게 그토록 ‘근대의 고향’으로 칭송됐던 서구로 떠나는 뜻깊은 여행이었다. 저술하다 과로로 피를 토하며 쓰러지곤 했던 천생의 글꾼 양계초는 유럽여행 기간 내내 부지런히 기록을 하여 1920년 &lt;구유심영록절록&gt;(歐遊心影錄節錄)이라는 제목으로 서구 여행 감상록을 펴냈다. 사상의 근원지를 순례하는 기분으로 떠난 양계초는 과연 서구의 모습을 어떻게 그렸을까? <br /><br />한마디로 이 여행은 양계초에게 여태까지 피상적으로만 알았던 서구의 진면목에 눈을 뜨는 ‘진리의 순간’이었다. 런던에서 그는 제1차 세계대전이 유럽을 얼마나 파괴했는지를 피부로 느끼게 된다. 고급 호텔에서조차 전쟁 직후의 물자 부족으로 따뜻한 물도 성냥도 구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영국 다음으로 간 프랑스에서는 그가 보고자 했던 중세의 성당들은 전쟁의 포화로 처절한 모습을 보였으며, 포도주 생산지들은 공동묘지처럼 변했다. “자연의 파괴보다 인간의 파괴가 더 심하고, 야만인의 파괴보다 문명인의 파괴가 더욱더 심하다”는 말은 양계초의 명언이다. <br /><br />이것뿐이었는가? ‘새 세계 개조의 시점’으로 기대코자 했던 강화회의는 이권 나누어먹기에 바쁜 세계적 야수들의 모임이었고, ‘민주의 성지’로 생각했던 서구는 제대 군인과 노동자들의 불만으로 곧 폭발할 화약고로 보였다. 입헌군주제나 민주정치를 ‘윗사람과 아랫사람들이 서로 합심하여 통합할 수 있는 최선의 정체’라고 선전했던 양계초는, 데모·파업 등의 진행 장면에서 “하나의 서구 국가 안에서 압제자와 피압제자의 두개의 적대 국가가 존재한다”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진보와 국민 통합의 서구’의 이상적인 그림은, 서구 따라잡기에 몰두한 비서구 지식인들의 순진한 환상에 불과했던 것이다. <br /><br />양계초의 결론은 무엇이었는가? 서구 자본주의 사회의 지배 담론인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사회진화론과 이 담론을 통해서 탐욕을 채웠던 서구의 야만적인 지배자들이 그들의 문명을 막다른 골목으로 이끈다는 것이었다. 약자에 대한 착취와 강자들 사이의 경쟁이 진보의 원동력이라면 그 진보의 결과는, 약자들의 혁명이나 전쟁으로 인한 공멸이라는 것이다. “경쟁은 진보의 어머니”라는 요지의 글들로 조선 지식인들을 매료시킨 양계초는 자신의 말을 취소하게 된다. 불교의 자비, 유교의 ‘균무빈·화무과’(均無貧·和無寡: 평등한 분배의 이상), 도교의 지족(知足) 사상만이 세계를 서구식 폭력으로부터 구할 수 있다는 것은, 그가 마지막으로 도달한 결론이었다. <br /><br /><br />어디까지나 보수적 온건파로 남아 있지만… <br /><br /><br />“자본주의라는 병을 공산주의라는 약으로도 고칠 수 없다”고 한 그는 정치적으로 어디까지나 보수적인 온건파로 남아 있다. 동아시아 사상이 자본주의적 야만의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좋다 해도 그 대안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양계초는 별다른 말을 남기지 못했다. 그러나 동아시아의 근대적 국가주의 원조 중의 한 사람인 양계초가 뒤늦게나마 서구적 근대의 야만성을 파악·폭로한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동아시아의 양심적인 지식인 양계초가 일본 책 속의 합리적·민주적 서구를 관념적으로 좋아했지만, 진짜 서구의 폭력적인 모습을 보자 서구가 파멸로 이끌고 가는 세계의 운명에 대한 걱정을 하게 된 것이다. 착취당하는 주변부의 어떤 양심적 지성인의 입장에서라도 서구를 다르게 볼 수 있었을까? 일부 미국 학자들은 &lt;구유심영록절록&gt;을 ‘유교적 보수주의로의 회귀’라고 혹평하지만, 이 글은 주변부 지식인 입장에서의 서구 비판의 아주 훌륭한 예다. 다만, 1900년대 양계초에 반해버렸던 당대의 조선 지식인들이 이 깨달음의 글을 접할 길이 거의 없었음은 아쉬운 일이다. <br /><br /><br />[참고 자료]<br />1. 양계초 서구 여행 관련 서술(중국어):<br />http://www.xinhuinet.gov.cn/xhsz/lqcsh/lqc29.htm<br />2. 이만열 교수(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의 논문, “개화기 언론과 중국(양계초를 중심으로)”:<br />http://user.chol.com/~ikch0102/y-1-12.htm<br />3. “양계초를 공부하는 집”:<br />http://finance99.com.ne.kr/left.html<br />4. “운허스님으로부터 들은 만해 이야기”(만해와 양계초의 관계):<br />http://yousim.buddhism.org/html/2001-win/plan-jung-kwang-ho.htm<br />5. 양계초가 천진에서 한때 거주했던 양옥의 사진:<br />http://www.wayabroad.com/tianjin/gaone/gaone52.htm<br />6. 양계초의 주요 저서인 &lt;신민설&gt;(1902년) 전문(한문):<br />http://sangle.web.wesleyan.edu/etext/late-qing/xms.html<br /><br /><br /><br />박노자 | 오슬로국립대 교수 · &lt;아웃사이더&gt; 편집위원 <br /><br /><br />]]></description>
                        <pubDate>Wed, 18 Feb 2004 03:03:2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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