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2일, 우리들 중 10여 명은 그 이튿날 있을 군사파쇼독재 반대데모를 위해 묵정동의 한 여관의 2층 큰 방에서 밤을 새우며 그 준비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 여관은 생활전선에 뛰어드신 나의 할머니가 세를 얻어 운영하고 계시던 곳이었다.
누구는 매직펜으로 플래카드를 쓰느라, 또 누구는 구호문을 작성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민아무개는 한옆에서 흰 무명천 위에 “조 군국주의(弔 軍國主義)”라고 붓글씨를 쓰고 있었다. 그이는 붓글씨를 무척 잘 썼다. 신동수 선배는 옆방에서 선언문을 쓰고 있었는데, 그의 선언문은 너무 길다는 평을 듣고 있었다. 그가 중간에 우리들에게 읽어준 선언문 초안도 역시 길었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던 탓이었다.
그날 밤, 임검의 위험이 있었으므로 우리들은 한옆에 화투와 트럼프 및 장기판을 준비해두고 여차하면 생일을 축하하여 친구와 함께 밤새워 놀고 있는 것으로 위장하려 하였다. 그리고 그날이 내 생일인 것처럼 말을 맞추어두었었다.
그렇게 준비는 하고 있었지만 설마 실제로 임검이 나오겠나 싶었는데 밤 2시쯤 되었을 때, 종만이가 --- 독자는 기억하고 있으리라. 택시운전을 하던 내 친구의 이름을 --- 방으로 뛰어들어오더니 임검 형사 둘이 들이닥쳤다고 알려주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부리나케 모든 준비물을 투숙객이 없는 옆방으로 옮기고 이불로 덮어씌웠다. 그리곤 짝을 지어 화투와 트럼프 놀이 그리고 장기를 두는 척하고 있을 즈음에 형사들이 들어왔다.
결국 우리들은 아슬아슬하게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그것은 한편, 할머니가 미리 평소에 비해 많은 임검값을 형사들에게 지불해 그들의 기를 누그러뜨려 꼬치꼬치 조사하지 않게 한 덕이기도 했다.
형사들이 돌아가고 안도의 숨을 쉴 즈음, 우리들은 유인태가 없어진 것을 발견하였다. “인태가 어디 갔지?” 하고 걱정하고 있을 때, 문이 바스스 열리더니, “형사들 갔지?” 하면서 그가 들어왔다. 그는 2층의 창문을 통하여 밑으로 뛰어내려가 숨어 있었던 것인데, 우리들 중 아무도 그가 창문을 넘어간 것을 본 사람이 없었다. 워낙 경황들이 없던 탓도 있지만 마지막까지 함께 준비물을 치우고도 어느새 재빨리 자리를 피한 유인태의 민첩함도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민첩했던 그는 대학 졸업도 민첩하게 했는데, 그 때문에 나중에 다른 학생들보다 훨씬 오래 감옥을 살아야 했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사형수가 된 그는 이철 등 다른 이들이 10개월 만에 풀려날 수 있었음에 반하여 당시 학생 신분이 아니라는 이유로 이현배 선배 등과 함께 4년 넘게 고생을 했던 것이다. 그가 출옥할 때, 나는 그를 맞으러 광주에 내려갔었으나 당국이 미리 빼돌려 만나지 못했다. 그는 지금 국회의원이 되었는데 나에게는 그때, 여관방 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약간 겸연쩍어하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
71년 10월 15일: 위수령이라는 것
우리가 여관방에서 위기를 모면하면서 준비한 선언문, 피켓, 플래카드 그리고 민모군이 흰 무명천에 붓글씨를 일필휘지하여 “弔 軍國主義”라고 쓴 만장 등은 끝내 사용하지 못하고 말았다.
반군사파쇼독재 학생데모가 점점 더 열기를 더해 심각한 상황에 이르고 있다고 판단한 서울대학교측에서 긴급 학장회의를 갖고 임시휴교를 결정하였다. 그 사실을 전혀 몰랐던 학생들은 굳게 잠긴 교문 앞에서 우왕좌왕하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우리도 임시휴교가 끝나길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임시 휴교령은 그 이틀 후에 있을 위수령의 전주곡이었다.
박정희가 위수령을 발동한 10월 15일은 문자 그대로 군홧발이 대학을 점령한 날이었다. 휴교중인데다 마침 개교기념일이기도 하여 학생들이 거의 없었던 서울대에선 별 불상사가 없었으나 고려대를 비롯한 다른 대학에선 학생들에 대한 포악한 행위가 벌어져 학생들을 개 패듯 팼고 또 개 끌 듯이 끌어갔다. 대학은 군인들이 진주하여 폐쇄되었고 수백명의 학생들을 학생데모의 주모자들이라 하여 학교측에서 추방시켰을 뿐만 아니라 머리를 빡빡 깎아 군대로 끌어갔다.
군국주의 위수령의 위력은 대단했고 또 살벌했다. 10월이었는데 이미 겨울이었다. 다시 문을 연 대학은 부는 바람조차 을씨년스러웠고 교정엔 낙엽만 뒹굴었다. 일체의 써클활동과 또 일체의 집회가 금지되었으므로 연극반에서 연습을 시작했던 내 습작극도 습작으로 끝났다. 우연의 일치였을까? 극본의 제목 '폐쇄된 도시'처럼 대학은 폐쇄되었고 또 부제로 붙인 '추방자'처럼 학생들은 대학에서 추방되었다.
나는 개똥을 먹었다
대학은 계속 조용했다. 내 가슴은 문리대가 조용한 채 학기를 넘겨선 안된다고 말하고 있었다. 학기말이 다가올 무렵인 6월 20일에 나는 드디어 선언문을 작성, 천문기상학과의 채관수 선배와 박건용과 함께 교내에 뿌렸다.
한달 후에 우리들은 붙잡혔고 동대문경찰서, 중앙정보부 그리고 치안본부의 전신인 시경 대공분실을 두루 방문하게 되었다. 신동수 선배는 관련이 없었는데 같이 고생했다.
나에게 대공분실은 정말 무서운 곳이었다. 중앙정보부보다 더 무서웠다. 중앙정보부에서는 우리의 선언문보다 '5타도!'라는 삐라 때문에 고초를 겪었다. 그 '5타도!'의 다섯 사람 중에서 제 1번은 물론 박정희였다. 나는 그곳에서 그 삐라에 대하여 처음 알게 되었는데 그것이 우리들의 작품이 아니냐고 추궁을 당했던 것이다. 나는 뱀눈에 콧수염의 그 취조관의 인상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대공분실이 더 무서웠다. 우리는 도착하자 곧 한 방에 한 사람씩 갇혔다. 이미 중정(중앙정보부)에서 한차례 경험했던 터라 더욱 마음을 졸이고 있었는데 서너 명의 거한이 “홍세화가 어떤 놈이야!”하며 방으로 들어올 때 나는 까무러칠 것 같았다. 아니, 차라리 까무러쳤다가 그 절차가 다 끝난 뒤에 깨어났으면 하고 갈구했다. 그들은 스스로 진짜 간첩을 다루는 사람들이라고 자랑하였다. 중앙정보부의 취조관들이 뱀 같은 냉혈동물이라면 대공분실의 취조관들은 한 마리의 먹이를 향해 달려드는 늑대떼들이었다. 잠시 쉬는(?) 시간에 쇠창살 밖으로 날아가는 작은 새를 보았을 때 눈물이 저절로 주르르 흘러내렸다. 나는 까무러쳐 그 작은 새가 되고 싶었다. 작은 새가 되어 마음껏 날아가고 싶었다.
그들이 우리를 취조한 것은 선언문 내용에서 '반공법'에 걸 만한 빌미를 찾아내 기소하겠다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는데, 그 이외에도 “김대중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김지하를 잘 알지?"등을 묻기도 했다. 김대중씨는 한번도 본 적이 없었는데 김지하 선배를 모른다고 할 수는 없었다. 나는 “김지하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라고 말했다가 “이 새끼가 아직 기가 안 죽었네” 소리와 함께 여지없이 발길질에 나둥그러졌다. 그런 상황이었으므로 “김지하를 모르면 간첩이지요”라는 말은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 대공분실도 중정과 마찬가지로 역시 남산 중턱에 있었고, '신한무역'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었다. 그들은 실제 무역회사의 간부사원들인 양 서로 전무, 상무, 부장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그들에겐 한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민주화운동을 자기들의 처지와 바로 연결시켜 “나중에 나에게 복수하려고 하지?” 따위의 질문을 하지 않는 사람이 드물었다. 그들의 특수한 직업이 주는 일종의 콤플렉스일 것이다. 그때 부장이라는 사람도 나에게 이렇게 윽박질렀다.
--- 그래서, 혁명을 해서 나 같은 사람에게 복수하겠다는 거지?
나는 조건반사적으로 다음과 같이 대꾸했다.
--- 아닙니다. 아니에요. 우리는 혁명을 말하지도 않았어요.
그때, 내 가슴은 이어서 이렇게 말하라고 요구하였다.
--- 그리고 당신이 말하는 그런 혁명은 설사 일어난다고 해도, 당신은 계속 그 자리에 그렇게 있을 거고 나는 또 이 자리에 이렇게 있을 것이오.
그러나 나는 말하지 못했다. 할아버님께 또 거짓말을 했다. 나는 개똥을 먹었다.
누구는 매직펜으로 플래카드를 쓰느라, 또 누구는 구호문을 작성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민아무개는 한옆에서 흰 무명천 위에 “조 군국주의(弔 軍國主義)”라고 붓글씨를 쓰고 있었다. 그이는 붓글씨를 무척 잘 썼다. 신동수 선배는 옆방에서 선언문을 쓰고 있었는데, 그의 선언문은 너무 길다는 평을 듣고 있었다. 그가 중간에 우리들에게 읽어준 선언문 초안도 역시 길었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던 탓이었다.
그날 밤, 임검의 위험이 있었으므로 우리들은 한옆에 화투와 트럼프 및 장기판을 준비해두고 여차하면 생일을 축하하여 친구와 함께 밤새워 놀고 있는 것으로 위장하려 하였다. 그리고 그날이 내 생일인 것처럼 말을 맞추어두었었다.
그렇게 준비는 하고 있었지만 설마 실제로 임검이 나오겠나 싶었는데 밤 2시쯤 되었을 때, 종만이가 --- 독자는 기억하고 있으리라. 택시운전을 하던 내 친구의 이름을 --- 방으로 뛰어들어오더니 임검 형사 둘이 들이닥쳤다고 알려주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부리나케 모든 준비물을 투숙객이 없는 옆방으로 옮기고 이불로 덮어씌웠다. 그리곤 짝을 지어 화투와 트럼프 놀이 그리고 장기를 두는 척하고 있을 즈음에 형사들이 들어왔다.
결국 우리들은 아슬아슬하게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그것은 한편, 할머니가 미리 평소에 비해 많은 임검값을 형사들에게 지불해 그들의 기를 누그러뜨려 꼬치꼬치 조사하지 않게 한 덕이기도 했다.
형사들이 돌아가고 안도의 숨을 쉴 즈음, 우리들은 유인태가 없어진 것을 발견하였다. “인태가 어디 갔지?” 하고 걱정하고 있을 때, 문이 바스스 열리더니, “형사들 갔지?” 하면서 그가 들어왔다. 그는 2층의 창문을 통하여 밑으로 뛰어내려가 숨어 있었던 것인데, 우리들 중 아무도 그가 창문을 넘어간 것을 본 사람이 없었다. 워낙 경황들이 없던 탓도 있지만 마지막까지 함께 준비물을 치우고도 어느새 재빨리 자리를 피한 유인태의 민첩함도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민첩했던 그는 대학 졸업도 민첩하게 했는데, 그 때문에 나중에 다른 학생들보다 훨씬 오래 감옥을 살아야 했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사형수가 된 그는 이철 등 다른 이들이 10개월 만에 풀려날 수 있었음에 반하여 당시 학생 신분이 아니라는 이유로 이현배 선배 등과 함께 4년 넘게 고생을 했던 것이다. 그가 출옥할 때, 나는 그를 맞으러 광주에 내려갔었으나 당국이 미리 빼돌려 만나지 못했다. 그는 지금 국회의원이 되었는데 나에게는 그때, 여관방 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약간 겸연쩍어하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
71년 10월 15일: 위수령이라는 것
우리가 여관방에서 위기를 모면하면서 준비한 선언문, 피켓, 플래카드 그리고 민모군이 흰 무명천에 붓글씨를 일필휘지하여 “弔 軍國主義”라고 쓴 만장 등은 끝내 사용하지 못하고 말았다.
반군사파쇼독재 학생데모가 점점 더 열기를 더해 심각한 상황에 이르고 있다고 판단한 서울대학교측에서 긴급 학장회의를 갖고 임시휴교를 결정하였다. 그 사실을 전혀 몰랐던 학생들은 굳게 잠긴 교문 앞에서 우왕좌왕하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우리도 임시휴교가 끝나길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임시 휴교령은 그 이틀 후에 있을 위수령의 전주곡이었다.
박정희가 위수령을 발동한 10월 15일은 문자 그대로 군홧발이 대학을 점령한 날이었다. 휴교중인데다 마침 개교기념일이기도 하여 학생들이 거의 없었던 서울대에선 별 불상사가 없었으나 고려대를 비롯한 다른 대학에선 학생들에 대한 포악한 행위가 벌어져 학생들을 개 패듯 팼고 또 개 끌 듯이 끌어갔다. 대학은 군인들이 진주하여 폐쇄되었고 수백명의 학생들을 학생데모의 주모자들이라 하여 학교측에서 추방시켰을 뿐만 아니라 머리를 빡빡 깎아 군대로 끌어갔다.
군국주의 위수령의 위력은 대단했고 또 살벌했다. 10월이었는데 이미 겨울이었다. 다시 문을 연 대학은 부는 바람조차 을씨년스러웠고 교정엔 낙엽만 뒹굴었다. 일체의 써클활동과 또 일체의 집회가 금지되었으므로 연극반에서 연습을 시작했던 내 습작극도 습작으로 끝났다. 우연의 일치였을까? 극본의 제목 '폐쇄된 도시'처럼 대학은 폐쇄되었고 또 부제로 붙인 '추방자'처럼 학생들은 대학에서 추방되었다.
나는 개똥을 먹었다
대학은 계속 조용했다. 내 가슴은 문리대가 조용한 채 학기를 넘겨선 안된다고 말하고 있었다. 학기말이 다가올 무렵인 6월 20일에 나는 드디어 선언문을 작성, 천문기상학과의 채관수 선배와 박건용과 함께 교내에 뿌렸다.
한달 후에 우리들은 붙잡혔고 동대문경찰서, 중앙정보부 그리고 치안본부의 전신인 시경 대공분실을 두루 방문하게 되었다. 신동수 선배는 관련이 없었는데 같이 고생했다.
나에게 대공분실은 정말 무서운 곳이었다. 중앙정보부보다 더 무서웠다. 중앙정보부에서는 우리의 선언문보다 '5타도!'라는 삐라 때문에 고초를 겪었다. 그 '5타도!'의 다섯 사람 중에서 제 1번은 물론 박정희였다. 나는 그곳에서 그 삐라에 대하여 처음 알게 되었는데 그것이 우리들의 작품이 아니냐고 추궁을 당했던 것이다. 나는 뱀눈에 콧수염의 그 취조관의 인상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대공분실이 더 무서웠다. 우리는 도착하자 곧 한 방에 한 사람씩 갇혔다. 이미 중정(중앙정보부)에서 한차례 경험했던 터라 더욱 마음을 졸이고 있었는데 서너 명의 거한이 “홍세화가 어떤 놈이야!”하며 방으로 들어올 때 나는 까무러칠 것 같았다. 아니, 차라리 까무러쳤다가 그 절차가 다 끝난 뒤에 깨어났으면 하고 갈구했다. 그들은 스스로 진짜 간첩을 다루는 사람들이라고 자랑하였다. 중앙정보부의 취조관들이 뱀 같은 냉혈동물이라면 대공분실의 취조관들은 한 마리의 먹이를 향해 달려드는 늑대떼들이었다. 잠시 쉬는(?) 시간에 쇠창살 밖으로 날아가는 작은 새를 보았을 때 눈물이 저절로 주르르 흘러내렸다. 나는 까무러쳐 그 작은 새가 되고 싶었다. 작은 새가 되어 마음껏 날아가고 싶었다.
그들이 우리를 취조한 것은 선언문 내용에서 '반공법'에 걸 만한 빌미를 찾아내 기소하겠다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는데, 그 이외에도 “김대중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김지하를 잘 알지?"등을 묻기도 했다. 김대중씨는 한번도 본 적이 없었는데 김지하 선배를 모른다고 할 수는 없었다. 나는 “김지하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라고 말했다가 “이 새끼가 아직 기가 안 죽었네” 소리와 함께 여지없이 발길질에 나둥그러졌다. 그런 상황이었으므로 “김지하를 모르면 간첩이지요”라는 말은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 대공분실도 중정과 마찬가지로 역시 남산 중턱에 있었고, '신한무역'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었다. 그들은 실제 무역회사의 간부사원들인 양 서로 전무, 상무, 부장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그들에겐 한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민주화운동을 자기들의 처지와 바로 연결시켜 “나중에 나에게 복수하려고 하지?” 따위의 질문을 하지 않는 사람이 드물었다. 그들의 특수한 직업이 주는 일종의 콤플렉스일 것이다. 그때 부장이라는 사람도 나에게 이렇게 윽박질렀다.
--- 그래서, 혁명을 해서 나 같은 사람에게 복수하겠다는 거지?
나는 조건반사적으로 다음과 같이 대꾸했다.
--- 아닙니다. 아니에요. 우리는 혁명을 말하지도 않았어요.
그때, 내 가슴은 이어서 이렇게 말하라고 요구하였다.
--- 그리고 당신이 말하는 그런 혁명은 설사 일어난다고 해도, 당신은 계속 그 자리에 그렇게 있을 거고 나는 또 이 자리에 이렇게 있을 것이오.
그러나 나는 말하지 못했다. 할아버님께 또 거짓말을 했다. 나는 개똥을 먹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