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les/attach/images/48968/54229/staright_147160_1[174368].jpg


송두율 작은아들 송린씨 인터뷰

송린(28)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경기도 군포 서울구치소에 갇혀 있는 송두율 선생님의 작은아들이다. 나는 지난해 12월 11일 500번째를 맞은 민가협 목요집회에서 송린과 정정희(62) 사모님을 처음 뵈었다.

고난은 사람과 사람을 이어준다. 아들과 그 어머니가 보랏빛 수건을 목에 두르고서 송두율 선생님 사진이 실리고 이름, 수감 번호, 가짜 죄명이 적힌 패널을 맞잡아 들고 서 있는 모습에 나는 잠깐 몸과 마음이 먹먹해졌다. 믿어지지 않는, 악몽 같은 하루하루를 석 달 가까이 지내오면서 어머니는 오히려 "브레히트의 <어머니의 용기>에 나오는 강인한 어머니가 되어"갔다.

함께 하고자 한다면 말로만 하지 말고 다만 조금이라도 몸을 움직여야 한다. 나는 며칠 뒤 2차 공판이 있던 날 일터에 하루 휴가를 냈다. 아침에 서울구치소에서 만나 낮에는 서울형사지법 311호 법정으로, 그리고 대책위 모임을 마치고 밤늦게 헤어질 때까지 긴 하루를 두 분과 함께 했다.

사람 많은 지하철을 갈아타고 택시를 타고, 걷고, 여러 사람 속에 섞여서 밥을 같이 먹고, 그렇게 별 말 없이 쭉 동행하는 동안 나는 왜 두 분이 매 순간 긴장되고 신경이 예민하게 곤두 서 있을 수밖에 없는지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보이지 않는 무거운 짐을 지고 동동걸음으로 하루하루 가파른 길을 걷고 있는 두 분 곁에서 나는 오히려 새로운 힘을 얻었다. 두 분이 온 몸과 마음으로 겪어 내고 있는 큰 고통이 나를 따뜻하고 지혜롭게 이끌어 주는 것 같았다. 그래서 고맙고 또 미안했다. 나도 이분들께 힘이 되어드릴 수 없을까.

이런 저런 매체와 인터뷰를 할 때면 대부분 어머니가 얘기하시고 린은 그림자처럼 어머니 곁을 묵묵히 지킨다. 나는, 아버지를 면회하러 가면서 태어나 처음으로 감옥에 가 보게 되었다는 과묵한 린의 얘기가 듣고 싶어졌다.

인터뷰 시간을 잡기가 쉽지 않아서 이메일로 서면 인터뷰를 했다. 린은 잘했던 우리말을 많이 잊어버려서, 인터뷰는 영어로 했다. 몸 아픈 것이 낫지 않아서 고생하고 마음도 힘들고 거기다 너무나 바쁘기까지 한데도 인터뷰에 잘 답해 준 린에게 고마움을 전한다...<필자 주>

마침내 한국에 오게 되었을 때… 큰 기대를 했어요. 내 모국을 방문할 기회를 지금껏 간절히 기다려 왔으니까…. 부모님이 자라고 공부한 나라를 정말 보고 싶었고, 친지들과 부모님 친구분들을 만나보고 싶었고 그리고 넓게는 이곳 한국 사람들과 사회를 보고 싶고, 사람들이 서로 영향을 미치고 소통하는 방식도 아주 많이 궁금했어요.

그리고 아름다운 땅 한국에 대해 마음 깊이 그리고 있었기 때문에 드디어 내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기회가 오니까 가슴이 설레기도 했어요. 또 부모님이 고향 나라에서 어떤 감회에 젖고 어떤 행보를 가지실지 곁에서 보고 싶기도 했고요. 오랜 망명 생활을 했다고 해서 조국이 바뀌는 일은 없으니까요….

지난 9월 22일 비행기가 인천공항에 착륙했을 때 마치 내 평생의 꿈이 이루어진 것만 같았습니다. 그날 하루처럼 부모님이 기쁨에 젖어 행복해하시는 모습은 이전에는 좀체 본 적이 없어요.

아버지는 여러 가지 회의에 참석해서 강연을 할 예정이었고 광주에 있는 대학에서는 명예박사학위도 받기로 되어 있었어요. 공식 행사 외에 우리 가족은 제주도에 가 보고 싶어했어요. 제주도 말고도 이곳 저곳 볼 시간을 가져보자 생각했어요. 그러나 아버지의 귀국 직후 일어난 끔찍한 일들 때문에 이런 계획들 가운데 어느 것도 이루질 못했습니다.

여기 한국은 우리 부모님의 고향이에요. 그러니까 이 세계에서 제 존재의 근원이 놓인 곳이기도 하지요. 독일에서 나고 자라긴 했지만 나는 늘 독일인이 아니라 한국사람이라고 느꼈습니다. 지금도 이곳이 나의 진짜 모국으로 느껴지고 독일이 결코 정서적으로 이 자리를 대신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나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모국을 잘 알고 싶다는 커다란 바람이 있었어요. 그러나 불행히도 올해 2003년까지는 그것이 전혀 가능하지 않았어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처음으로 남한에 올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주위의 모든 사람이 나한테 너무 위험하다고 다 말렸어요. 결국 포기했지요.

나는 몹시 슬펐고 굉장히 좌절했어요. 그런데 그것이 아버지한테는 더 그랬을 거예요. 내가 남한에 갈 수 없다는 것을 말하면서 아버지는 우셨어요. 당신이야 그렇다 치고 당신의 아들조차 당신의 고향 나라에 갈 수 없다는 것에 깊은 상처를 받으셨어요.


지난 석 달 동안 우리 가족 모두 육체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몹시 지치고 힘겨운 시간이었습니다. 어떤 땐 우리가 버티어낼 수 있는 한계를 훨씬 넘어서곤 해요. 하지만 제가 구치소에 가서 아버지를 만날 때, 그리고 국가보안법으로 피소되거나 구금된 사람들에 관한 소식을 듣거나 글을 접할 때면 새로운 힘을 얻곤 합니다.

하루하루가 정신없이 지나가요. 모임은 많은데 다 참여하기가 어렵고, 만나고 싶은 사람을 다 만나지도 못합니다. 하루는 24시간뿐인데 우리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요. 지금 아버지 건강이 별로 안 좋은데, 정부 당국이 협조를 제대로 안 하고 상황을 더 어렵고 위태롭게 만드니까 이것을 조율하느라 시간을 많이 보내게 돼요.

서울에서는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요. 이동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시간을 써 버리게 되지요. 이것이 불편해요. 또 하나는 서울에서 여기저기를 오고 갈 때 너무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알아보는 거예요. 위협을 느끼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누군가 저와 어머니를 뚫어지게 쳐다본다고 느껴질 때는 불편하고 힘들지요.

아버지가 무척 자랑스럽습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 비극 이전에 아버지가 이미 받은 것만도 엄청나요. 군사독재 시절 남한의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해 온 마음과 정성을 기울여 싸웠다는 것 때문에 37년 동안 망명 생활을 해야 했던 것이요. 둘로 갈라진 고향 나라의 화해와 평화로운 통일을 향해 평생을 달려온 결과였지요.

한 개인의 삶의 조건과 상황이라고 볼 때 37년의 망명 생활은 이미 우리들 대부분이 상상할 수 있는 것을 훨씬 초월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만으로도 아버지는 이미 너무나 많은 것을 희생하셨습니다. 아버지가 지금 겪고 있는 일은 믿을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럽고 잔인해요. 어떻게 견디어내시는지 정말 놀랍기만 합니다.

아버지는 국정원과 검찰이 요구한 사상 전향에 서명하는 것을 거부하셨어요. 그 서명은 아버지의 모든 원칙과 지금까지 해온 모든 일을 파괴하는 것이었겠지요. 아버지는 엄청난 강제 상황에서조차 서명을 거절했고, 그 거절이 심각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도 끝까지 단호하셨어요. 아버지를 정말 존경합니다.

아버지 마음에는 지금의 이 편협한 정치를 훨씬 뛰어넘는 목표가 있고, 그 때문에 지금 이토록 고통을 겪고 계십니다. 조국을 향한 큰 사랑 때문이지요. 이 사랑이 지금의 야만적인 대우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고 변함없는 것을 보면서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아버지는 검찰이나 보수 세력들보다 더 길고 넓은 전망 속에서 생각합니다. 나는 이것이 나중에 역사에 의해 평가되기를 희망합니다.

나는 서울에 와서 더 좋은 사회, 좀더 인간적인 사회를 만들기 위해 애쓰고 그런 목표를 위해 많은 것을 아낌없이 바치는, 내가 만난 수많은 사람들의 강한 의지와 용기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한국 사회는 역사에서 상당히 중요한 시점에 와 있는 것 같아요. 많은 다양한 측면들이 억압을 받고 있거나 불안정한 상태인데, 많은 사람들이 깨어 있으면서 그러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고 자신들의 이상을 위해 싸우는 것을 보는 것이 기쁩니다. 지금까지 제가 만난 한국 사람들의 정직함, 따뜻함, 툭 트인 마음이 정말 좋고, 그것에 감동했습니다.

실망스러운 점도 있어요. 예를 들면 토론이 이루어지는 방식 같은 거요. 토론하는 쌍방을 극단으로 설정해 놓는 것이나 극단으로 생각하는 것은 생산적이고 전망 있는 토론 분위기를 방해할 것 같거든요. 상대를 존중해 주고 상대의 말에 귀기울이는 분위기가 없이는 한 사회가 더 나아지기 힘들지요.

이 "이것 아니면 저것"식의 대화나 행동은 이 나라에 해로울 수도 있습니다. 이 흑백논리의 결과로 사람들은 자기와 같은 방식으로 행동하거나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 굉장한 증오와 알레르기 반응을 내보입니다. 한 예가 우리 아버지 같은 경계인이죠. 아버지는 양자택일만이 아닌 좀더 다양한 가능성과 미래를 위해 흑과 백 사이 회색 지대를 탐험하고 연구해 오신 분인데….

그리고 냉전과 군사독재의 잔재가 아직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뚜렷이 남아 있어요. 바깥 세계는 이곳 한국의 햇볕정책과 민주주의를 믿고 또 그것에 큰 희망을 품었습니다. 하지만 제 아버지가 지금 겪고 있는 일은 다시금 온 세상에 한국이 여전히 갈 길이 멀고 또 그 길이 고통스러우리라는 것을 보여준 셈이 되었어요.

한반도의 분단은 이미 헤아릴 수 없는 고통과 증오를 낳았고, 지금도 계속 그러고 있습니다. 남한과 북한에는 놀랄만한 자원과 사람이 있어요. 지금처럼 불신과 의심투성이의 분단 상태에서보다 통일된 나라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능력과 힘을 자신의 미래를 위해 좀더 효과 있고 좋은 방식으로 쓸 수 있을 겁니다.

독일 통일 후로 한국은 세상에서 유일한 분단 국가로 남아 있고, 우리는 독일에서 분명히 보았습니다. 비록 그것이 힘겨운 과정이었고 여러 가지 실책이 있었다 해도 통일을 해서 얻는 이익이 통일을 안 할 때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요.

이곳 한국의 상황은 과거 독일의 경우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까다롭습니다. 하지만 만약 양측의 사람들이 앞으로 서로를 포용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된다면, 그래서 다른 쪽을 있는 그대로 봐 줄 방법을 개발한다면 첫 번째 중요한 발걸음은 뗀 것이라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이 때 국가보안법이 계속 '법'으로 존속하면서 한국 사람들의 마음에 숨겨진 망령으로 잔류한다면 이 법은 이 아름다운 하나됨의 꿈을 향한 그 어떤 노력이나 바람직한 행동도 막아 버릴 겁니다.

제 아버지는 이 목표를 향해 현재 살아 계신 몇 안 되는 다른 분들만큼 열심히 일하고 연구해오셨습니다. 아버지가 지금 겪고 있는 비극을 넘어, 살아서 당신 평생의 꿈이 실현되는 것을 보기를 정말 간절히 소망합니다.